[황인숙의 행복한 시읽기]<392>희망촌 1길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3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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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촌 1길 ―임형신(1948∼ )

은사시나무 포자가 눈처럼 날리는 언덕에 희망촌이 있다 상계4동 배수지 아래 철거민들이 모여들어 사십 년 넘게 희망을 먹고 산다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골목마다 만신들의 깃발이 펄럭이고 그 옆에 엉거주춤 태극기도 붙들어 매져 있다

기울어진 담벼락에 나팔꽃 씩씩거리며 올라간다
사금파리에 찔린 청도라지
독기를 뿜고 웃자라는
한 뼘의 마당
대낮은
텅 비어 있다

무허가 봉제 공장 사라지고 교회가 들어섰다 목공소 있던 자리 단청 고운 절도 하나 들어앉아 서로 마주보며 희망 한 줌씩 나누어 준다 겨우살이풀처럼 늘어져 있는 할머니들 등 뒤 며느리밥풀꽃도 기웃거리고

만신들의 깃발이 휘청거린다
오늘 또 무엇이 들어와서
어떤 희망 한 줌
뿌리고 가려나


은빛 잎사귀들이 파르르 나부끼는 은사시나무 숲 아래에 작은 집들 올망졸망한 언덕. 버스 타고 지나가다 차창 너머로 보았다면 정감어린 동네라 느낄 수도 있을 테다. 어디서 보는가, 누가 보는가. 동네 내력을 잘 아는 이가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골목’을 고샅고샅 걸으면서 보는 풍경은 척박하다.

‘골목마다 만신들의 깃발이 펄럭이고 그 옆에 엉거주춤 태극기도 붙들어 매져 있다’, ‘무허가 봉제 공장 사라지고 교회가 들어섰다 목공소 있던 자리 단청 고운 절도 하나 들어앉아 서로 마주보며 희망 한 줌씩 나누어 준다’. 곤고하나마 생활을 꾸려 나가게 해주던 일터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들어선 교회와 절. 세상에 기댈 데 없는 사람들, 더이상 희망이 없는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찾아들 곳은 신의 가슴뿐이라는 걸까.

종종 종교는 무지와 절망을 먹고 크는 듯하다. ‘철거민들이 모여들어 사십 년 넘게 희망을 먹고 사는’ ‘희망촌 1길’. 동네나 집 이름에 ‘희망’ ‘햇살’ ‘별빛’ 같은 이름이 붙으면 슬프다. 실상은 그 정반대라는 역설을 보여주는, 어린이처럼 무구한 꿈을 실낱처럼 붙들고 있는 이름…. 주민들이 다른 동네로 밥벌이 나가 ‘대낮은/텅 비어 있’는 희망촌 1길, ‘은사시나무 포자가 눈처럼 날리’고 ‘만신들의 깃발이 휘청거린다’. 세밀하고 적확한 사실적 묘사로 현실과 풍경을 꿰어내는 시인의 힘!

황인숙 시인
#희망촌 1길#임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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