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갑식 기자의 뫔길]강을 건넜으면 뗏목은 두고 가라 일렀거늘…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6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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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나그네가 긴 여행 끝에 크고 넓은 강에 이르렀다. 강 너머는 평화롭고 아늑한 땅이 있다. 그는 강을 건널 나룻배를 찾을 수 없자 공들여 뗏목을 만들었다. 무사히 강을 건넌 그는 새삼 자신을 건너게 해준 뗏목이 고맙기도 하고 아깝게 여겨진다. 그는 마침내 그 무거운 뗏목을 어깨에 메고 걷기 시작했다.

아함경 중 유명한 뗏목의 비유다. 부처는 ‘강을 건넜으면 뗏목은 두고 가라’고 했다. 좋은 법이나 진리조차 집착하고 얽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대한불교조계종의 국회격인 중앙종회가 표결 절차를 둘러싼 논란은 있지만 25일 종헌 개정안을 만장일치로 가결해 비구니들이 초심 호계위원과 법규위원에 선출될 수 있도록 했다. 초심과 재심으로 나뉘는 호계위원은 사법부 판사, 법규 위원은 헌법재판소 재판관에 해당한다. 종헌 개정은 종단 소속 12000여 명의 스님 중 절반에 가깝지만 주요 선출직에서 배제된 비구니들의 숙원이었다.

종회는 종헌 개정을 통해 초심 호계원을 7명에서 9명으로 늘리고, 비구니 호계위원 2명을 둘 수 있도록 했다. 단, 비구니 호계위원은 비구(남성 스님) 징계사건의 심리와 판결에 참여할 수 없다. 법규위원 자격도 비구에서 승려로 바꿔 비구니들이 선출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하지만 이날 종회에서는 우여곡절이 적지 않았다. 한 중견 스님은 “두 차례 부결된 이후 언론과 여성단체들이 비구가 비구니 인권을 무시했다고 주장한 것은 잘못”이라며 “율장(律藏·계율)이 아닌 사회법을 근거로 법 통과를 주장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종헌 개정이 단지 언론과 여성단체들의 여론을 의식해 이뤄진 것이라면 종회의 상황 인식은 우려할 만한 수준이다. 일부에서는 율장을 그 근거로 들고 있지만, 자신에게도 의지하지 말라고 당부한 것이 부처의 가르침이다. 율장에 얽매여 종단 대부분의 선출직에서 비구니를 원천적으로 배제한 것은 지금 부처가 다시 오셔도 놀랄 일이다. 아마도 다시 “강을 건넜으면 뗏목을 두고 가라”는 불호령이 떨어질 것이다.

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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