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역경을 넘어 자신만의 낙원을 찾아낸 ‘섭섭이’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4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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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신부 진이/앨런 브렌너트 지음·이지혜 옮김/464쪽·1만3500원·문학수첩

결혼을 통해 현실 탈출을 꿈꾸는 여성은 늘 있었다. 1897년 경상도 보조개골에서 태어난 섭섭이도 그랬다. 아들이 아니라는 이유로 제대로 된 이름조차 갖지 못했다. 그에게 글을 가르쳐주고 보배라는 의미의 ‘진(珍)’이라는 이름을 붙여준 선생님을 통해 섭섭이는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뜬다. 하지만 그럴수록 현실은 더욱 숨 막힐 뿐이었다.

기회가 왔다.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던 조선인 남성이 진이의 사진을 보고 신부로 맞기로 한 것. 그렇게 수많은 조선의 여성들이 ‘사진신부’가 돼 하와이로 갔다. 하지만 길에 금이 깔린 파라다이스는 없었다. 기다리고 있는 건 남편의 폭력뿐. 진이는 남편에게서 도망쳐 홀로서기를 감행한다. 집창촌에서 바느질을 하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삶의 길목마다 예상치 못한 고비가 이어지지만 진이는 묵묵히 헤쳐 간다.

미국인이 쓴 소설이지만, 조선의 풍속을 세밀하게 묘사해 읽는 재미를 준다. 하와이에서 벌어지는 인종 갈등과 소수민족이 처한 현실도 밀도 있게 짚어냈다. 인생의 폭풍우를 뚫고 조금씩 나아가는 진이의 모습이 담백한 문장을 통해 속도감 있게 그려진다. 100년이 지난 지금,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한국으로 시집온 외국인 여성에게서 ‘사진신부’의 모습이 겹쳐진다. 그러기에 진이의 인생은 과거가 아닌 현재의 이야기로 다가온다. 한국에서 힘겹게 뿌리내리고 있는 수많은 진이에게 보내는 응원 같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사진신부 진이#결혼#섭섭이#하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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