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가 태어나 부귀와 함께하다가 기록되지 못하기보다는 한 가지 기예로라도 이름이 나야 한다고 했으니 … 겸옹(謙翁)은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으나 그림으로 덮인 바 있으니 이를 아는 이가 없네.”
조선 영정조 때 문신 박사해(1711∼?)가 지은 ‘창암집(蒼巖集)’에 나오는 글이다. 여기서 겸옹은 겸재 정선(1676∼1759)을 말한다. 겸재는 한반도의 산세를 독자적 필치로 표출한 진경산수의 대가다. 국보 제216호인 ‘인왕제색도’나 제217호 ‘금강전도’를 비롯한 걸작 산수화를 숱하게 남겼다. 하지만 그가 인물화, 특히 선인들의 이야기를 담은 고사(故事) 인물화도 많이 그렸다는 사실은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겸재정선기념관이 최근 창간한 학술지 ‘겸재와 미술인문학 연구’에는 겸재의 인물화에 초점을 맞춘 논문 2편이 게재됐다. 송희경 이화여대 한국문화연구원 연구교수와 민길홍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각각 ‘정선의 고사 인물화’ ‘겸재 정선의 인물화’를 통해 겸재의 인물화를 새로이 조명했다.
겸재가 고사 인물화를 즐겨 그린 데는 자신의 학문적 성취와 주위 환경이 크게 작용했다. 박사해가 안타까워했듯 겸재는 상당한 내공을 지닌 유학자였다. 그만큼 옛 선인들의 고사에 해박했으며 관심이 높았다. 게다가 북악산 기슭에서 태어난 겸재는 어릴 적 안동 김씨 명문가 문하를 드나들며 성리학과 시문을 배웠다. 송 교수는 “겸재는 정통 노론에 영향을 깊이 받아 주자학에 오래도록 심취했다”며 “친교를 맺은 사대부들의 요청이 잦았던 것도 고사 인물화를 많이 그린 요인이 됐다”고 설명했다.
겸재가 그린 역사적 인물은 참으로 다양하다. 공자가 제자들과 경전을 읽고 음악을 즐긴다는 내용인 ‘행단고슬도(杏壇鼓瑟圖)’와 제갈량이 와룡강에 은거했을 때를 담은 ‘초당춘수도(草堂春睡圖)’, 노자를 소재 삼은 ‘기우출관도(騎牛出關圖)’, 한나라 개국공신 장량을 그린 ‘야수소서도(夜授素書圖)’도 전해진다.
그 가운데 송대육현(宋代六賢·중국 송나라 여섯 명의 성리학자인 소옹 주돈이 장재 정호 정이 사마광)을 겸재는 가장 즐겨 그렸다. 특히 주자에게 큰 영향을 끼쳤던 정호(程顥·1032∼1085) 정이(程이·1033∼1107) 형제에 애착이 커 ‘부강정박도(溥江停泊圖)’ ‘방화수류도(訪華隨柳圖)’ ‘정문입설도(程門立雪圖)’를 포함해 관련 고사 인물도를 여러 점 그렸다.
겸재가 그린 인물화는 주로 자연을 배경으로 고사 속 인물을 배치하는 산수인물화였다. 당대 최신 중국 화단의 흐름을 꿰뚫고 있던 그는 문인화의 대표 격인 남종화(南宗畵)를 근간으로 자신만의 개성이 담긴 수묵담채화를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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