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15일 서울 중구 소공동 롯데호텔서울 한식당 ‘무궁화’에서 ‘한식의 재해석’ 요리 행사를 연 프랑스 출신 요리사 에리크 트로숑. 그는 현재 한국의 사찰 음식에 관심을 갖고 있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한식은 그저 비빔밥이 전부인 줄 알았다. 김치는 빨갛고 밥은 하얗고…. 또 왜 그렇게 맵고 짭짤한지. 하지만 5년 전 한국에 처음 와서 삼겹살을 먹은 후 달라졌다. 쌈을 싸먹고 장에 찍어 먹고, 갖가지 맛이 입에서 ‘폭발’하는 느낌이었다. 프랑스에서 맛볼 수 없는 경험, 왠지 모르게 끌렸다. 고향에 돌아가 한국인 유학 친구, 동료에게 “한식이 뭐냐”고 물어봤다. ‘소반(Sobane)’ 같은 파리에 있는 한식당들도 찾아다녔다. 다시 한국에 왔을 땐 유명 레스토랑부터 허름한 동네 음식점까지 분주히 돌아다니며 한식을 연구했다.》 입 폭발할 듯한 한식에 호기심
5년 동안 12번 한국을 찾는 동안 ‘한식에 관심 많은 프랑스 요리사’란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어느덧 한국의 특1급 호텔에서 자신의 이름을 내건 ‘요리쇼’까지 하게 됐다.
한식에 대해 “호기심과 열정을 자극하는 음식”이라고 말하는 프랑스 출신 요리사 에리크 트로숑 씨(49). 2년 전 프랑스에서 ‘최우수 기능장(MOF·un des Meiller Ouvrier de France)’에 뽑힌 요리사이자 레스토랑 ‘세미야(Semilla)’ 총주방장인 그가 롯데호텔 초청을 받아 14, 15일 이틀 동안 서울 중구 소공동 롯데호텔서울 한식당 ‘무궁화’에서 요리 행사를 열었다. 롯데호텔이 프랑스 요리사를 초빙해 한식당에서 요리 행사를 연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롯데호텔 관계자는 “한식을 세계에 알리기 위한 방법을 찾던 중 트로숑 씨에 대해 듣게 됐다”며 “한식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아 요리쇼를 제안했다”고 말했다.
행사의 주제는 ‘한식의 재해석’. 육회부터 굴전, 매운탕 등 프랑스 스타일로 만든 한식 메뉴 9개를 내놨다. “한국에 프랑스의 영혼을 섞었다”고 말하는 그를 15일 오후 롯데호텔서울에서 만났다.
―한식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프랑스에 유학 온 한국 요리사들이 한식을 비롯한 한국 문화에 대해 얘기를 많이 했다. 한국에 와서는 프랑스 요리에 관심이 많은 한국 친구들을 만났다. 이들은 오미자로 스파클링 와인을 만들고 김을 갖고 요리를 하는 등 프랑스 음식을 한국식으로 재해석하더라. 나도 프랑스 고기에 한국의 배즙과 참기름을 얹은 ‘육회’를 처음 만들었는데 두 나라의 에너지가 음식에 담겨 있는 느낌을 받았다.”
양념 스며들게 하는 방식 똑같아
―한식과 프랑스 요리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한식이나 프랑스 요리 모두 역사와 전통이 오래됐다. 양념 위주의 요리도 많은데 특히 양념이 음식에 스며들게 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음식 특유의 ‘열정’과 ‘기’가 담겨 있다.”
그는 샴페인과 와인 셔벗을 곁들여 먹는 굴전을 시작으로 프랑스산 고기에 배를 넣어 만든 ‘쇠고기 롤(육회)’, 프랑스 소스 ‘아이올리(마늘과 마요네즈를 섞은 것)’를 넣은 매운탕 등 요리 7개와 디저트 2개를 코스로 내놨다. 흔히 먹는 한식에 프랑스 소스나 재료를 넣었다. 재료를 섞어 없던 메뉴를 만드는 식의 ‘화학적 결합’이 아닌 ‘물리적 결합’에 가깝다.
그는 “요리는 많은 사람과 교류를 해야 나오는 것”이라며 “프랑스 파리 한식당 ‘소반’ 김정규 대표부터 이병우 롯데호텔 총주방장 등과 끊임없이 논의한 끝에 나온 메뉴들”이라고 말했다.
30만∼50만 원으로 비싸지만 그의 재해석을 경험하기 위해 식당에는 이틀 동안 70명이 다녀갔다. 그에게 ‘한식의 세계화 가능성’을 물었다.
‘한식은 비빔밥’ 외국인 통념 깨야
“음식이라는 것은 그 나라에 가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문화 입문서’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정부나 한국의 유명 레스토랑에서 한국 요리를 더 많이 알릴 필요가 있습니다. 아직도 비빔밥밖에 모르는 서양인이 많아요. 내가 프랑스 친구들에게 삼계탕을 해준 적이 있는데 ‘이게 어느 나라 요리냐’며 관심을 보였습니다. 오히려 잘 알려지지 않았고 서양 음식과 다르다는 사실 자체가 매력적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그는 어릴 적 현대 프랑스 요리의 창시자이자 ‘누벨 퀴진(새로운 요리)의 아버지’로 불리는 프랑스 유명 요리사 폴 보퀴즈를 보고 요리사의 꿈을 키웠다. 이제는 프랑스에서 ‘최우수 기능장’이라 부를 정도로 그도 거장이 됐다. 그의 요리 철학은 ‘호기심을 가져라’다.
“내가 한국에 대해 관심을 가진 것처럼 사물에 대해 호기심이 있어야 창조적인 요리를 만들 수 있죠. 그런 의미에서 요즘 선재 스님(선재사찰음식문화연구원장)과 한국 사찰 음식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있습니다. 사찰 음식의 재해석, 멋지지 않나요?”
김범석 기자 bsism@donga.com ▼프랑스 소스 넣은 매운탕서 크림맛이 …▼
○ 트로숑이 재해석한 한식코스
9개 코스 요리 중 첫 번째로 나온 굴 요리. 굴전과 생굴, 와인 셔벗이 어우러진 식전 요리다. 롯데호텔 제공에리크 트로숑이 재해석한 한식 메뉴 9개는 완전히 새로운 음식은 아니었다. 기존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 프랑스 느낌이 나는 소스나 재료를 사용했다는 점이 기존 한식과의 차이점이다.
코스의 시작은 굴 요리. 굴전과 생굴, 와인 셔벗이 어우러진 전채(前菜·애피타이저)이다. 여기에 굴과 궁합이 맞는 샴페인이 곁들여져 전체적으로 ‘시원함’을 강조했다.
다음 요리는 키조개와 크림소스를 얹은 흰죽. 마치 고소한 크림소스 스파게티를 먹는 느낌이었다. 얇게 뜬 프랑스 쇠고기에 채를 썬 배를 넣고 말아 김밥처럼 만든 쇠고기 롤(육회)은 ‘입’보다 ‘눈’이 더 자극됐다. 빨간 육회와 노란 달걀노른자, 유채꽃 장식이 한데 어울려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했다.
골수 튀김을 곁들인 쇠꼬리찜, 어린잎 샐러드를 넣은 도가니탕 등 이어 나온 메인 요리들은 앞 메뉴들에 비해 한국적 느낌이 강했다. 하지만 프랑스 소스 ‘아이올리’(마늘과 마요네즈를 섞은 것)를 넣은 세 번째 메인 요리 ‘매운탕’은 달랐다. 겉보기엔 매콤한 전통 한식처럼 보였지만 아이올리 소스를 넣어 먹으니 매콤한 맛은 사라지고 ‘크림 맛’의 느끼함이 자리했다. 매운맛에 익숙하지 않은 외국인들은 좋아할 법했다.
9개 요리가 다 나오는 데 걸린 시간은 1시간 반. 맵고 짠 한식 특유의 맛에 길든 한국인에게는 다소 밋밋한 맛, 한식을 경험하지 못한 외국인들에겐 색다른 맛을 준 시간이다. ‘한식의 세계화’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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