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LIFE]용의 등줄기 9km, 바다위 구름 속을 걷다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2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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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큰둥해 갔다가 반해 버린 ‘홍콩 트레킹’

섹오 피크 인근에서 바라본 남중국해. 홍콩의 트레킹 코스들엔 이렇듯 탁 트인 경관이 많아 가슴이 뻥 뚫린다. 10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가 트레킹하기에 가장 좋다고 한다. 홍콩관광청 제공
섹오 피크 인근에서 바라본 남중국해. 홍콩의 트레킹 코스들엔 이렇듯 탁 트인 경관이 많아 가슴이 뻥 뚫린다. 10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가 트레킹하기에 가장 좋다고 한다. 홍콩관광청 제공
《애초에 큰 기대가 없었다. 그렇다고 산을 오르는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내도 이번 출장을 의아해했다. “홍콩에 트레킹을 하러 간다고? 당신이?”

그럴 만도 했다. 사람들은 대부분 ‘홍콩’ 하면 ‘쇼핑’ ‘야경’ 따위의 단어를 떠올린다. 트레킹을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기자도 그랬다. 북한산 정상도 올라본 적 없는(높이로 따지면 설악산 울산바위가 최고기록인) 초짜이니 당연한 걸까. 그런데 산 좀 다녀봤다는 주변인들의 반응도 다르지 않았다. 조금씩 알려지곤 있지만 ‘홍콩 트레킹’은 아직 낯선 단어다.

사흘 만에 집으로 돌아온 기자는 아내에게 말했다. “거기 좋더라. 심지어 나도 할 만해. 다음엔 같이 갈까?” 》

의외성의 매력
프러포즈, 성과급, 영화, 여행….

트레킹 마지막을 장식한 1100여 개의 돌계단 길. 송한의 씨 제공
트레킹 마지막을 장식한 1100여 개의 돌계단 길. 송한의 씨 제공
이들의 공통점은 뭘까. 다양한 답변이 가능하겠지만, 다음 의견에 굳이 반대할 사람이 많진 않을 것 같다. ‘기대하지 않았던 순간에 더 큰 감동을 맛본다는 것’ 말이다. 기대치 않았던 반지 선물에 여성들은 눈물을 흘린다. 회사 사정이 어려운데도 사장님이 손수 쥐여주는 꼬깃꼬깃한 떡값봉투는 직원들을 감동시킨다. 그저 시간이나 때우려 보러 간 영화가 재밌으면 엄지손가락을 한껏 치켜들게 된다. 낯선 여행지에서 우연히 마주한 시골밥상의 맛은 세월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다.

홍콩 트레킹이 딱 그렇다. 아내를 포함해 “홍콩에서 무슨 트레킹이냐”는 사람들에게 감히 권해본다. 기회가 된다면 일단 가보시라. 물론 기대는 잠시 접어두고. 한껏 의심해야 감동이 배가 될 테니 말이다.

지난달 16일 한국은 꽤 추웠다. 두꺼운 외투 차림으로 인천공항에 갔지만, 홍콩 첵랍콕 국제공항에 도착했을 땐 긴팔셔츠 하나면 충분했다. 홍콩의 11월은 평균 23∼24도로 따뜻한 편. 12월과 1월에도 10도 아래로 떨어지는 날이 거의 없단다. 오전 8시 50분(한국 시간) 비행기를 타니 11시 반쯤(홍콩 시간) 도착했다. 비행 시간은 3시간 반 남짓인데, 홍콩 표준시간이 한국보다 1시간 느린 덕분이다. 다시 말하자면 아침에 조금만 서두르면 오후엔 홍콩에서 트레킹을 즐길 만한 시간이 충분히 확보된다는 얘기다.

일행을 인솔한 송한의 씨(49)는 “용의 등줄기를 타러 간다”고 했다. 하긴, 트레킹 코스 이름이 ‘드래건스 백(龍背·용의 등) 트레일’이니까. 홍콩 트레일의 마지막 8구간인 이 코스는 홍콩 섬 동남쪽의 ‘섹오(石澳)’ 교외공원에 있는 능선 길로 9km가 조금 못 된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려면 지하철 MTR 사우케이완 역에 내려 A3 출구에서 9번 버스를 타면 된다. 섹오 도로를 타고 올라가다 토테이완 마을 입구에서 내려야 하는데, 버스운전사에게 미리 부탁하는 게 좋다.(물론 시작 지점과 종료 지점을 달리하면 다양한 길이, 방향의 코스를 짤 수 있다.)

첫 시작은 당연히 오르막이다. 수풀 사이로 난 들쭉날쭉한 계단을 10분이나 올랐을까. 꽤 가팔랐는지 저절로 끙끙대는 소리가 새나온다. 창피함과 함께 평소의 게으름에 대한 후회가 밀려들었다. 하지만 길은 곧 그런 마음을 달래줬다. 갑작스레 왼쪽으로 바다의 풍광을 내어준 것이다. 마치 이맘때쯤 힘들어할 거란 걸 훤히 꿰뚫어본 것처럼. “우와!” 사람들은 일제히 타이탐 만(灣)과 스탠리 반도를 향해 카메라를 꺼내들었다. 스탠리 반도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이 영국인들을 가둬뒀던 곳. 홍콩이 열흘 만에 점령당하는 바람에 영국인들 대부분이 피란을 떠나지 못했다고 한다. 지금의 스탠리 반도는 그 아픔을 모두 털어낸 듯 아름다운 자태를 뽐낸다.

어쨌든 발걸음이 경쾌해졌다. 높이 올라가면 이런 풍광이 더 멋질 거란 기대가 샘솟은 덕분이었다. 홍콩으로 향하는 비행기에서도, 트레킹 코스로 이동하는 버스에서도 사실 기대보단 의구심이 컸었다. 그게 완전히 역전되는 데 걸린 시간은 딱 10분이었다.

변화무쌍의 매력
10분쯤 더 올랐다. “이제 힘든 코스는 다 올라왔다”는 인솔자의 목소리가 반가웠다. 이내 좌우로 바다가 보이는 탁 트인 능선이 나타났다. 왼쪽엔 조금 전에 봤던 타이탐 만이, 오른쪽으론 새롭게 모습을 드러낸 남중국해가 끝없이 펼쳐졌다. 이쯤 되면 게임오버. 3시간 코스 중 겨우 30분이 지났을 뿐인데도 말이다. 오디션 프로그램 참가자의 첫 소절만 듣고도 ‘합격’ 버튼을 눌렀던 심사위원이 결코 경솔한 게 아니었구나 싶었다. 2004년 타임지 아시아판이 왜 이곳을 아시아 최고의 트레킹 코스라고 극찬했는지는 300%쯤 수긍이 갔다.

코스 중 가장 높은 지점인 섹오 피크(284m)까지는 20여 분을 더 걸었다. 양쪽에 바다를 끼고 높은 곳을 향하다 보면 마치 구름 위를 걷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그러니 걷는 게 걷는 게 아니었다. 출근길 만원버스에 매달려 있던 20분과 구름 위의 사뿐사뿐한 20분은 물리적으론 같은 시간이다. 그렇지만 하나는 평생 기억나지 않고, 다른 하나는 두고두고 떠오를 것이다. 여행의 묘미란 이런 게 아닐까. 단 며칠을 투자해 몇 년은 우려먹을 추억거리, 말거리, 감동거리를 확보하는 것 말이다.

섹오 피크에서 완참산(264m)까지의 능선 길에서도 바다의 풍광은 계속됐다. 길은 박스권에 든 증시 차트처럼 높낮이가 완만하게 일정했다. 얕은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지만 등산화가 아닌 운동화로도 충분히 날아다닐 수 있었다. 비록 산악자전거를 타고 내려가는 아저씨나 반바지 차림의 연인들과 마주쳐 살짝 기가 죽었지만.

길은 지루함으로 ‘100만 불짜리 풍광’의 빛이 퇴색하는 걸 허락지 않았다. 일단 숲 속으로 트레커들을 안내해 바다를 숨겼다. 첫 걸음을 내디딘 지 2시간쯤 지나서는 뜻하지 않은 시멘트 길을 걷도록 만들었다. ‘이게 뭐지?’ ‘용의 등이라더니, 용두사미구먼.’ 간사한 사람의 마음은 직전의 감동을 잊은 채 불만스러워졌다. 그런데….

역시 길은 짓궂다. ‘강약약, 중강약약’의 다이내믹함으로 무장한 채 오락가락하는 사람들의 변덕을 즐긴다. 길이 마지막으로 꺼내든 카드는 내리막 계단. 1100개가 넘는 돌계단(참고로 울산바위가 808계단)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아래로는 큰 파도로 서핑족을 불러 모으는 타이룽완 해변이 보였다. 풍광은 이쯤에서 절정으로 치닫는다. 안구정화의 ‘종결자’라고나 할까. 물론 계단이 많은 만큼 내리막길은 쉽지 않았다. 코오롱스포츠의 글로벌 트레킹 프로젝트 이벤트에 참여한 김효남(40) 정명자(40) 씨 부부는 “풍광에 취해 너무 방심하면 안 될 것 같다”고 했다.

홍콩에 산 지 13년째라는 송 씨가 내린 홍콩 산의 정의는 대략 이랬다.

“이 곳의 산은 일단 도심에서 가깝죠. 그리고 재밌습니다. 지루한 길도 없고, 탁 트인 공간도 많거든요. 사계절 변하지 않는 게 흠이지만, 계절마다 다른 산을 가면 그만입니다. 여름엔 계곡에, 가을엔 억새밭에 가는 식이죠.”

단 한 곳에 가봤을 뿐이지만,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트레킹을 마쳤다.

○홍콩의 트레킹 코스

홍콩에서 가장 유명한 트레킹 코스로는 홍콩 섬의 ‘홍콩 트레일’(50km·1985년 개방), 주룽 반도의 ‘매클리호스 트레일’(100km·1979년 개방·동서 방향)과 ‘윌슨 트레일’(78km·1996년 개방·남북 방향)이 있다. 공항이 있는 란타우 섬이나 홍콩 섬 바로 아래의 라마 섬에도 트레킹족을 유혹하는 훌륭한 코스가 많다. 홍콩 트레킹 코스의 특징은 대부분 영국령일 당시 군사적 목적으로 쓰였다는 것. 홍콩 트레일은 홍콩 섬에 주둔한 군대의 유사시 이동을 대비해 만들었고, 매클리호스 트레일은 군인들의 산악교통로였다.

홍콩=김창덕 기자 drake007@donga.com
#홍콩#트레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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