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사라진 베이징인 화석, 야쿠자 금고에?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1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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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진화, 뜨거운 주제들]동아시아의 불을 지배한 인류

2009년 가을이었습니다. ‘베이징인(베이징원인으로 불리기도 함)’ 발견 80주년 기념학회에 초대받아 중국에 갔습니다. 베이징인은 1920년대 베이징(北京) 남서쪽의 저우커우뎬(周口店) 동굴에서 발견됐죠. 19세기 말 인도네시아에서 발견된 ‘자바인’과 함께 아시아의 호모 에렉투스(똑바로 선 사람이란 뜻)를 대표합니다. 논문 발표가 끝나고 화석이 발견된 장소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동굴을 둘러보며 새삼스러운 감회에 사로잡혔죠. 고인류학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유적이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10년 전 받았던 e메일이 생각나서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가슴 떨리는 메일의 내용은 일본의 조직폭력배 야쿠자를 ‘습격’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야쿠자 입회식에 잠입하자고?

일본 도쿄 남쪽 가나가와(神奈川) 현에서 박사 후 연구원 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어느 날 낯선 이에게서 e메일을 받았습니다. 그는 자신을 야쿠자를 조사하는 데 평생을 바친 기자라고 소개했습니다. 바로 다음 주에 야쿠자 입회식이 있는데, 그곳에 함께 잠입하자고 했지요.

고인류학자인 제게 왜 그런 제안을 하는 건지 처음엔 어리둥절했습니다. e메일을 읽어 보자 차차 상황이 파악됐습니다. 그가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입회식에는 베이징인의 원본 화석이 비밀리에 등장할 예정이었습니다. 기자에겐 그 화석의 진본 여부를 확인할 전문가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만약 사실이라면 수십 년 동안 미궁에 빠져 있던 고인류학계의 수수께끼가 풀릴 기회였습니다. 가슴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습니다.

베이징인은 인도네시아의 자바인과 함께 동아시아에도 호모 속(屬·genus)의 고인류가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 줬습니다. 어금니 한 점으로 시작된 발굴 조사는 1937년 중일전쟁 발발 때까지 계속 이어졌죠.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1년, 학자들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만 미국에서 화석을 보관키로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운송 중이던 화석이 베이징 동쪽 보하이(渤海) 만의 친황다오(秦皇島) 부두에서 홀연히 사라졌습니다.

그 후 원본 베이징인 화석을 되찾기 위한 고인류학자들의 추적이 시작됐습니다. 여러 가설이 제기됐습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에서 가져갔다, 중국 정부가 보관하고 있다 등의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최근에는 어린 시절 이 화석을 담은 상자를 마지막으로 봤다는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한 과학자는 그의 목격담 등을 토대로 조사를 벌였고, 베이징인 화석 상자가 당시의 폭격으로 대부분 파괴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다만 ‘어쩌면 지금은 항구로 개발된 지역의 땅 아래에 묻혀 있을 수도 있다’며 여운을 남겼죠. 이는 올해 3월 논문으로 발표됐고, 미국 국립지리학협회와 중국 정부가 조사를 지원할 정도로 큰 관심을 끌었습니다. 그렇지만 가능성이 희박해 항구 바닥을 뜯어 내진 않을 거라고 합니다.

일본 야쿠자가 가져갔다는 이야기도 이런 ‘설’ 중의 하나입니다. 따라서 그 기자의 주장이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하는 건 인류학자로서도 대단히 중요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미국에 계신 지도교수가 극구 만류하셨습니다. 정보의 진위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그렇게 위험천만한 일에 연루되면 안 된다는 것이었죠. 저는 결국 기자의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태평양 건너에 계시던 은사의 뜻을 거스를 배짱도 없었으니, 어쩌면 야쿠자 입회식 잠입은 애초에 제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불을 지배한 강인한 인류

어쨌든 베이징인 화석의 행방은 아직 오리무중입니다. 그렇다고 연구가 중단된 것은 아닙니다. 독일의 해부학자 프란츠 바이덴라이히(1873∼1948)가 남긴 베이징인 화석의 모본(模本·모형)이 있기 때문이죠. 이 모본은 원본을 대신할 수 있을 만큼 정교하고 완벽했습니다. 그 덕분에 많은 학자가 베이징인의 생활 모습에 관한 흥미로운 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학자들은 처음엔 베이징인, 즉 호모 에렉투스가 눈보라 치는 산속 동굴에서 털옷을 만들어 입고 불을 피워서 몸을 녹이거나 고기를 구워 먹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베이징 근처는 지금도 겨울이면 매우 추운 지역입니다. 게다가 50만 년 전 지구는 빙하기였습니다. 인류는 이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문화적인 방법으로 적응해야 했습니다. 불을 피우고 따뜻한 털옷을 만들어 입으며 견딘 것이죠. 실제 저우커우뎬 동굴 안에서는 불을 피우고 난 흔적인 재가 발견됐습니다. 다양한 동물 뼈와 석기도 발견돼 이런 추측에 신빙성을 높였습니다.

하지만 최근 에렉투스 시기의 화석이 전 세계적으로 발견되면서 여러 가지 의문점이 생기고 있습니다. 불만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화석이나 유물을 살펴봤을 때, 당시의 인류가 불씨를 관리하고 필요할 때마다 불을 지폈는지, 아니면 우연히 발화된 불씨를 가져와 요리를 하고 곁불을 쪼였는지가 불명확합니다. 원할 때마다 불을 피울 수 있었다면 베이징인은 그만큼 지금의 인간에 더 가깝다는 것이지만, 그렇지 않았을 개연성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수전 안톤 뉴욕대 교수(인류학)의 연구와 주장도 흥미롭습니다. 베이징인이 저우커우뎬에 살았던 때는 빙하기 중에서도 다소 따뜻한 기간인 아간빙기(亞間氷期·interstadial)였다는 것입니다. 또 그는 베이징인이 어쩌다 저우커우뎬에 흘러들어온 외지의 호모 에렉투스일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물론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어느 쪽 주장에도 명확한 증거가 없으니까요. 저우커우뎬 동굴에 선 저는 이런 사실들을 회상하면서 아련한 생각에 사로잡혔습니다. 베이징인 화석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혹시 정말 야쿠자 입회식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점점 미궁에 빠져들고 있는 베이징인의 정체와 함께, 화석의 행방도 영원한 수수께끼가 되고 있는 듯합니다.

이상희 리버사이드 캘리포니아대 인류학과 교수 sang-hee.lee@ucr.edu
정리=윤신영 동아사이언스 기자 ashilla@donga.com

※ 이 글은 ‘과학동아’와 동아일보 주말섹션 ‘O₂’에 동시 연재됩니다.

▼ 도쿄 최대 야쿠자 두목, 2차 대전때 중국 약탈 지휘 ▼

베이징인 화석이 사라진 과정은 대략 이랬다. 베이징인 화석은 전쟁이 끝나면 중국에 반환한다는 조건으로 미국의 스미스소니언박물관에 옮겨질 예정이었다. 화석은 완충재를 덧댄 채 9개의 철제 탄약상자 안에 숨겨졌다. 미국 공사관의 공의(公醫)였던 윌리엄 폴리 중령이 운반을 맡았다. 그런데 그가 베이징을 떠나기 전 진주만 공격이 일어났다. 중령 일행은 일본의 전쟁 포로 신세가 됐다. 이들은 한 항구로 옮겨졌고, 상자 9개는 거기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야쿠자 연루설이 제기된 건 히로히토 일왕의 동생 지치부 왕자가 이끈 ‘골든 릴리’(1937년 황군 최고사령부 산하에 창설된 조직으로 아시아 전역에서 약탈행위를 주도)의 최고 실력자가 고다마 요시오였기 때문이다. 도쿄 최대 폭력조직 야마구치구미(山口組)의 두목이었던 그는 도이하라 겐지 장군을 도와 중국에서 닥치는 대로 문화재와 귀금속 약탈했다. 베이징인 화석도 그의 손에 넘어갔을 개연성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고다마는 전쟁 당시 축적한 막대한 부를 이용해 전후 일본 내 극우주의 운동의 거물이 됐다. 1976년엔 자택에서 ‘가미카제 특공대’를 본뜬 경비행기 자살 테러를 당했지만 살아남기도 했다. 록히드 뇌물 사건의 판결을 기다리던 1984년 사망했다.

김창덕 기자 drake007@donga.com  
※ 참고문헌: 야마시타 골드(2003년·스털링, 페기 시그레이브·옹기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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