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로용 목함으로 쓰인 오륜행실도 목판(위). 강원도 유형문화재 152호 덕주사판 불설아미타경.
1797년 정조의 명으로 제작한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는 목판으로 대량 편찬한 책이다. 그림을 크게 싣고 관련 내용을 우리말로 달아놓아 일반 백성도 이해하기 쉽게 만들었다. 그런데 이 책을 찍는 데 쓰인 목판(木板)은 평면이 아닌 사각의 함(函) 모양이다. 심지어 한글을 양각한 두 면에는 각각 작은 구멍이 하나씩 뚫려있다. 왜일까.
2006년 이 유물을 입수해 공개한 한선학 강원 원주시 치악산 명주사 고판화박물관장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차를 끓이기 위한 화로용 목함으로 변형해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양면의 두 구멍은 손잡이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다. 이 유물은 일제강점기 당시 유물 훼손의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한 관장은 “모양이 변형됐다 해도 오륜행실도의 유일한 원 목판이기에 유물로서의 가치가 크다”고 평가했다.
오륜행실도 목판을 비롯해 한국과 중국, 일본, 티베트, 몽골 등 아시아의 목판 유물 200여 점을 선보이는 행사가 열린다. 명주사 부설 고판화박물관이 12∼14일 마련한 제3회 ‘원주 고판화 축제’다.
한국 유물은 조선 익종의 비 신정왕후(1808∼1890)의 칠순잔치를 기록한 진찬의궤 목판 원판, 강원도 유형문화재 152호인 덕주사판 불설아미타경 목판화 등 70여 점이 나온다. 중국 유물로는 1477년 명 황실에서 만든 판화 불정심(佛頂心)다라니경을 비롯해 중국 불교판화전집에 실린 판목과 목판화 유물 50여 점이 전시된다.
일본 유물은 에도시대(1603∼1867)에 제작된 소설 삼국지와 초한지, 서유기 등의 목판 원판과 채색 판화, 현대 만화의 효시가 된 목판화가 가쓰시카 호쿠사이(葛飾北齋·1760∼1849)의 화보 ‘만화’ 등 50여 점이 나온다. 이 중 삼국지 목판 원판 14장과 초한지 목판 원판 2장은 국내에서 처음으로 공개되는 것이다. 몽골의 지옥변상도 등 몽골과 티베트의 판화도 다수 전시된다.
티베트 불경인 대불정백산개다라니경(왼쪽).일본 에도시대에 제작된 소설 삼국지 속 삽화. 고판화박물관 제공한 관장은 “고판화에 있어선 중국이나 일본의 수준이 매우 뛰어나다”고 설명했다. 특히 ‘우키요에’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일본 에도시대의 채색 풍속 판화는 클로드 모네, 빈센트 반 고흐 등 유럽 인상파 화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중국 역시 뛰어난 채색 판화 작품을 많이 남겼다. 그런데 한국은 단색 판화가 대부분이다. 한 관장은 “성리학을 추종했던 조선시대에는 색이 있는 것을 천하게 여겨 채색 판화가 발달하지 못했다. 값싼 민화가 많이 그려져 판화 자체도 조선 민중에게 큰 인기를 누리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명주사 주지인 한 관장은 17년 동안 아시아 지역에 흩어진 목판화 관련 유물 4000여 점을 모았고 이를 기반으로 2004년 명주사 내에 고판화박물관을 세웠다. 이번 축제기간에는 중국 목판 인간문화재인 마시친(馬習欽) 전통각수가 방한해 판화의 제작과정을 소개할 예정이다. 033-761-7885. www.gopanhwa.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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