道란 비우면 찾아드는 것… 사무침 쌓이니 붓이 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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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8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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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터에 올린 시-그림 모아 책 낸 허허당 스님

허허당 스님이 그린 ‘그리움에 사무친 소녀’. 화엄경에 나오는 선재동자처럼 동네에서 만난 사람들을 순수한 꿈을 지닌 ‘소년소녀 동자상’으로 표현한 그림들이 스님의 새 책에 실려 있다. 예담 제공
허허당 스님이 그린 ‘그리움에 사무친 소녀’. 화엄경에 나오는 선재동자처럼 동네에서 만난 사람들을 순수한 꿈을 지닌 ‘소년소녀 동자상’으로 표현한 그림들이 스님의 새 책에 실려 있다. 예담 제공
허허당 스님은 “요즘 스님들 책이 인기인 이유는 스님들이 잘났기 때문이 아니다”라며 “세상이 워낙 각박하니까, 내가 느껴보지 못한 것에 대한 어떤 그리움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예담 제공
허허당 스님은 “요즘 스님들 책이 인기인 이유는 스님들이 잘났기 때문이 아니다”라며 “세상이 워낙 각박하니까, 내가 느껴보지 못한 것에 대한 어떤 그리움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예담 제공
경북 포항시 죽장면 비학산 자락의 산골마을. 선화가(禪畵家)인 허허당(虛虛堂) 스님이 살고 있는 휴유암(休遊庵)을 지난달 말 찾았다. 36m2(약 11평)짜리 단칸방인 이곳의 이름은 ‘쉬면서 노는 암자’라는 뜻이다. 대형 화폭에 부처상이 그려져 있는 작은 방에는 그림 도구와 찻잔, 이불들이 옹기종기 놓여 있었다.

“누군가 제게 절이 있느냐, 화실이 있느냐고 물어요. 저는 ‘다 있다’고 이야기하죠. 단칸방인 휴유암은 명상을 하면 선방, 그림을 그리면 화실, 누우면 침실이 되지요.”

스님은 여기에서 7년째 머무르며 선화를 그려 왔다. 2년 전부터는 산중 생활 속 명상을 담은 시와 그림을 트위터에 올리고 있다. 팔로어가 2만 명이 넘는다. 트위터에 올린 시와 그림은 최근 ‘머물지 마라, 그 아픈 상처에’(예담)라는 책으로 묶여 나왔다.

‘불이 나면 꺼질 일만 남고/상처가 나면 아물 일만 남는다./머물지 마라, 그 아픈 상처에.’

책의 첫 페이지에 나오는 이 시에 많은 젊은이들이 위로를 받았다며 공감을 표했다. 스님은 “디지털 사이버 공간도 생명의 세계”라고 했다. “트위터를 통해 내가 그들의 아픔에 반응하고, 산속의 청정함을 전해 주면 상상만으로 마음의 상처를 위로해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쓴 글들입니다.”

학들의 춤을 그린 ‘선무’. 스님은 “단박에 깨닫는 ‘돈오돈수’ 선 수행법처럼, 붓을 던지
듯이 그리는 새의 날갯짓은 굉장히 자유롭고 통쾌하다”고 말했다.
학들의 춤을 그린 ‘선무’. 스님은 “단박에 깨닫는 ‘돈오돈수’ 선 수행법처럼, 붓을 던지 듯이 그리는 새의 날갯짓은 굉장히 자유롭고 통쾌하다”고 말했다.
1974년 열여덟의 나이로 해인사에서 출가한 그는 향곡 스님 문하에서 수행하던 선승이었다. 1983년 지리산 벽송사 방장선원에서 문득 깨달음을 얻어 본격적으로 선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도는 결코 찾아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비워 버리면 스스로 찾아오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지요. 그래서 ‘비고 빈 집’이란 뜻의 ‘허허당’으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부처님의 8만4000개 법문에 담긴 깨달음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싶어 붓을 잡았어요. 그림 실력 부족으로 6, 7년간 엄청나게 방황했지만 지극한 ‘사무침’이 쌓이니 붓이 움직이더군요.”

그는 2008년 가로 12m, 세로 2.8m 크기에 100만 명의 동자승을 모자이크처럼 그려 넣은 ‘화엄법계 백만 동자-새벽’을 그릴 때는 1년여간 하루 17시간씩 건빵과 생수만 먹으며 작업했다. 해인사와 불일미술관 등 국내뿐 아니라 스위스와 미국 하와이에서도 전시회를 열었다. 강원 화천군은 내년 말까지 파로호 주변에 스님의 작품 전시관과 작업 공간이 들어서는 ‘화천아트빌리지’를 지을 예정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인생은 일하는 것이 아니라 노는 것, 한바탕 멋지게 놀다 가라”고 말한다. 그에게 그림은 생명을 노래하고, 통쾌한 자유를 느끼는 ‘붓놀음’이다. ‘붓을 던지니 학이 난다/한 소리에 하늘이 깬다’(‘선승의 눈-覺’)는 시는 이런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스님의 방에는 어울리지 않는 색소폰도 눈에 띄었다. 3년 전부터 교본을 보며 독학으로 익혀 온 악기다. 그는 “산속에서 나와 함께 호흡하며 대화해 온 도반(道伴)”이라고 소개했다.

“몇 년 전 비가 한꺼번에 너무 많이 와서 집 앞 계곡물이 불어나 거대한 파도처럼 넘실댔어요. 집 안에 그동안 그려온 수백 점의 그림이 있었는데, 마당까지 물이 차올랐어요. 급박한 순간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됐지요. 방안에 들어가 색소폰을 불며 모든 것을 잊고 놀았습니다. 그렇게 30분쯤 놀다 보니 비가 그치더군요.”

포항=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허허당 스님#트위터#시#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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