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대체 왜 우리가 한국 문학을 읽어야 합니까.” 2006년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서 독일 기자가 소설가 김영하(44)에게 도발적인 질문을 던졌다. 김영하는 이렇게 답했다. “우린 여러분이 앞으로 겪게 될 많은 문제를 미리 경험하고 있습니다. 한국 문학은 첨단의 미디어와 경쟁하고 있어요. 지하철에서 책을 거의 안 보고 자국 영화의 시장점유율이 50%를 넘나드는 상황에서 한국 작가들은 필사적으로 생존하려고 애씁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남는지 유심히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
‘오빠’가 돌아왔다. 지난 4년간 작품 구상과 해외 출간을 위해 미국 캐나다 이탈리아를 오가며 지내던 소설가 김영하가 최근 귀국해 서울 광화문광장에 섰다. 그런데 ‘오빠’는 금세 또 떠날 것 같다. 캠핑장비를 싸들고 전국 곳곳을 누빌 예정이라고 했다. 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문학 한류’의 가능성에 김영하는 일찍부터 주목했다. 등단 4년차인 1998년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1996년)가 프랑스에서 출간된 이후 그의 작품들은 미국 독일 네덜란드 터키 등 10여 개국에서 번역됐다. 1년 9개월간의 미국 뉴욕 컬럼비아대 연구원 생활을 마치고 최근 ‘돌아온 오빠’를 서울 광화문 인근에서 만났다. 미국 이탈리아 캐나다를 오가면서 ‘주거 부정’의 생활을 한 지 4년 만에 귀국하는 것이라고 했다.
―뉴욕에선 어떻게 지냈나요.
“낮엔 글 쓰고 밤에는 책 읽고…. 공원에 가서 자주 누워있었어요. 센트럴파크에 좋아하는 잔디밭이 있어요. 처음엔 몸만 갔는데 나중에는 깔개도 가져가고, 읽을 책도 가져가고, 얇은 담요도 가져가고, 비가 올지 모르니 우산도 가져가고, 나중엔 이것저것 담은 카트까지 끌고 갔죠. 지나가는 노숙인들이 동료 보듯 나를 쳐다보는 걸 알고 필요한 걸 모두 들고 다니는 사람, 이게 노숙인이구나 싶었습니다. 그 다음부터 간소하게 하고 다녔어요.”
―일찍부터 해외 시장에 진출했습니다.
“1995년 등단했고 1998년 ‘나는 나를 파괴할…’이 프랑스에서 나왔어요. 그게 작가의 일상사인 줄 알았죠. 예술가가 초기에 어떤 경험을 하느냐가 그의 행로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 같습니다. ‘다른 나라 독자들에게 읽히는 작가가 될 수도 있겠구나’라고 비교적 젊은 나이에 생각을 하게 됐죠.”
―일제강점기에 멕시코로 팔려간 사람들(애니깽)의 이야기를 다룬 역사소설 ‘검은 꽃’(2003년)이 10월 미국 휴턴미플린하코트에서 출간됩니다. ‘나는 나를 파괴할…’과 ‘빛의 제국’(2006년)에 이어 세 번째로 이 출판사에서 소설이 나오는데….
“담당 편집자로 제나 존슨이란 분이 있습니다. 지금은 임프린트의 책임자 자리에까지 올랐지만 2006년 저와 일을 시작할 때만해도 신참이었죠. 이 사람에게 ‘나는 나를 파괴할…’의 영어 원고가 갔는데 맘에 들어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 사람이 우연히 그 책의 프랑스어본을 읽고 나서 계약을 결심했다고 하더군요. 그 양반이 프랑스어를 못했으면 책을 못 낼 뻔했어요.”
―‘검은 꽃’의 영어 번역은 누가 했나요.
“찰스 라 슈어 한국외국어대 통번역학과 교수가 해주셨어요. 미국 독자들은 이해 못할 부분들은 뺐죠. ‘검은 꽃’이 처음엔 한국 소설이었는데 독일어 영어 등으로 번역돼 한 문장 더하고 빼고 해가면서 의미가 확장됩니다. 이 과정을 보면서 ‘편집자나 번역자도 저자’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집단적인 지성이 더해지면서 그 나라 그 언어의 문화유산이 되는 거죠.”
―‘문학 한류’라는 말에 대해서는….
“세계 문학은 불평등한 세계죠. 정신적 교류의 장에서 기존에 문학 시민권을 가진 여러 언어가 있는데, 한국어와 한국문학이 이제 시민권을 부여받는 과정인 것 같습니다.”
―앞으로의 계획은….
“캠핑장비와 중고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하나 사서 전국 곳곳을 누빌까 생각 중이에요. 산에도 가고 그곳에 사는 분들도 뵙고. 저는 PC통신을 일찍 시작했어요. 도시와 밤, 네트워크, 이런 세계가 넓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좁은 세계 속에 살아온 것 같습니다. 뉴욕 생활이나 캠핑이나, 모두 미래를 위해 씨를 뿌리는 것이죠. 당장이 아니라 10년, 15년 후에 발효돼서 (작품으로) 나타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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