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의 그늘과 그 안의 어둠은 경이로움과 두려움을 동시에 가져다줬다. 몇 걸음만 걸어 들어가도 짙은 그림자 속에 갇혀 버릴 것만 같았다. 여러 산을 걸어 보았지만, 이 산을 가득 채우고 있는 울창한 침엽수림의 위압감은 낯설었다. 나무의 윗부분은 초록이 가득했지만 빛이 들지 않는 아랫부분의 가지들은 온통 앙상하게 말라 있어 더욱 기묘했다.
자동차는 국도를 벗어나 비포장 길을 한참 달려서야 산장에 다다랐다. 시동을 끄고 차에서 내리자 이내 짙은 침엽수 향이 나를 감쌌다. 애팔래치아 산맥의 한 부분인 체로키 국유림(미국 테네시 주) 근처 어느 산장에서의 일주일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 곰을 조심하세요!
거대한 애팔래치아 산맥은 북미 대륙 동부를 남북으로 가로지른다. 산장으로 가는 길 주변엔 목가적인 풍경과 함께 크리스마스트리용 나무를 재배하는 묘목장이 가득했다. 올겨울 거침없이 베어져 누군가의 거실을 장식할 다양한 크기의 묘목들. 그들이 끝없이 펼쳐진 산마루를 보며 자국 산업 보호를 위해 교토환경의정서(지구온난화 규제 및 방지 협약)에서 탈퇴한 미국이란 나라에 대해 생각해 봤다. 세계 이산화탄소 배출량의 28%를 차지하고, 분리수거가 거의 지켜지지 않는 나라 말이다.
이번 여행에서 특별히 애팔래치아를 선택한 이유 중 하나는 산맥을 따라 이어지는 트레일(산 속의 오솔길)에 있었다. 1937년 완성된 애팔래치아 트레일은 약 3500km에 이르는 길고도 긴 산길이다. 미국 북부 메인 주에서 시작해 남부의 조지아 주까지 14개 주에 걸쳐 이어진다. 이 장대한 코스를 완주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최소 5개월.
산길을 걷는 도중 누구나 철학자가 된다고 하는 트레일. 이 길을 완벽하게 종주하는 이는 시작한 사람의 10%가 채 안 된다고 한다. 그저 내게도 인생에 꼭 한 번 도전해 볼 수 있는 날이 오기만을 바랄 뿐이다.
미국 국립공원 트레킹과 관련해서는 야생동물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그중 가장 많이 거론되는 존재가 곰이다. 해마다 곰에 의한 사고가 끊이질 않는다. 지금도 국립공원 캠핑장에는 ‘당신의 차가 곰의 도시락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시오’라는 안내 문구가 있다. 야영객들은 ‘자기 전에 남은 음식물은 주머니에 넣어 30m 떨어진 숲에 걸어 놓으시오’ 같은 재미있는 듯하지만 섬뜩한 안내를 꼭 지킨다고 한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홀로 야간산행을 잘 다니던 내게도 이곳에서의 이른 아침 단독 산책이 그다지 상쾌하지만은 않았다. 숲 안의 짙은 어둠 속에선 상상이 만들어 낸 갖가지 실루엣의 산짐승들이 나의 산책길을 쳐다보고 있었다. 다행히 토끼와 사슴은 실제로 만났지만 곰과는 마주치지 않았다.
○ 숲이 주는 위대한 고독
산장에서의 일주일 동안 많은 일화가 있었다. 하지만 모두 소개하기는 쉽지 않을 듯하다. 그래서 야생동물과 관련한 웃지 못할 에피소드를 하나 남겨 본다.
잠 못 이루던 어느 날 밤, 일행 둘과 함께 발코니(계단 3개만 내려가면 바로 숲과 이어짐)에 나와 밤하늘을 구경했다. 은하수가 진짜 강물처럼 흐르는 밤하늘은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다. 멀지 않은 곳에서 둔탁하고 이상한 개구리 울음 소리가 단편적으로 들려왔다. 그토록 서정적인 밤의 분위기를 깬 건 누군가의 한마디였다. “숲 속에서 뭔가 이쪽으로 오고 있어!”라는 다급한 목소리. 우리 셋은 호들갑을 떨며 있는 힘을 다해 문을 향해 뛰었다. 셋이 거의 동시에 문을 통과했다. 그리고 문을 거세게 ‘쾅’ 하고 닫았다. 우리는 숨을 고른 후 모두가 멀쩡한 것을 보고서야 한바탕 웃어 젖혔다. 그렇지만 그때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던 기억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 소동에 깨어난 다른 사람들이 거실로 모여들어 한밤의 산장은 꽤나 소란스러워졌다. 실제로 곰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며 서로를 위안했지만 그날 밤, 어느 누구도 산장 밖을 나서는 이가 없었다. 순간 나는 역시 우리나라 산이 최고라는 생각을 가슴에 품은 ‘애국자’가 되어 있었다.
마지막 날 아침, 무슨 객기가 생겼던지 매일 걷던 산길을 벗어나 숲으로 들어가 보았다. 숲 속은 생각보다 어둡지 않았다. 오히려 숲 안의 어슴푸레함 속에서 내다보는 바깥쪽의 아침햇살이 더욱 찬란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얼마나 걸었을까. 갑자기 그리 넓지 않은 야생 밀밭이 나왔다. 밀밭을 쓰다듬으며 그 복판을 향해 걸었다. 바람에 하늘거리는 밀 포기의 흔들림이 그렇게나 아름답다는 것을 나는 그때 처음 깨달았다. 애팔래치아 트레킹을 다룬 ‘나를 부르는 숲’이란 책이 있다. 저자 빌 브라이슨은 “숲은 위대한 고독의 공급처”라고 했다. 그의 말대로 나는 밀밭 한가운데 선 한 사람의 파수꾼이 되어 완전무결한 고독을 맛보았다. 그리고 비로소 세상의 어느 숲도 그 근본은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자 이전에 우리나라의 여러 숲에서 느꼈던 편안함이 스멀스멀 나를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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