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요한은 대전외국인학교 후배가 전화를 하면 “어, 너 전화기에 대고 90도로 절하고 있냐?”라고 농을 건다. 전통과 위계가 똘똘 뭉친 옛 생각을 하면서 그는 “이것이 정(情)”이라고 했다. 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 순천행 급행열차가 임촌역에 섰다. “서는 역은 아니지만 정비 관계로 잠시 정차하겠습니다.”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연세대 의대 예과 1학년 인요한(53·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 소장)은 힐끗 객차 선반의 자기 배낭을 쳐다봤다. 얼마 뒤 다시 굴러가기 시작한 기차가 역을 벗어나려는 순간,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손을 뻗어 배낭을 움켜쥐었다. 객실 복도를 한달음에 내달려 움직이는 열차에서 뛰어내렸다. 동순천역으로 향하는 열차는 그만을 남겨 놓고 멀어져갔다. 발걸음은 고향 순천이 아니라 광양으로 향했다. 사람들 눈에 잘 안 띄는 비포장도로를 따라 걸었다. 뒤를 돌아봤지만 아무도 쫓아오지 않았다. ‘1980년 5월 광주’ 이후 한동안 늘 누군가가 따라다녔다. 미칠 것 같았다. 》 ○ ‘불령미인(不逞美人·불온한 미국인)’
“새끼야, 내가 미국을 다 책임지냐!” 그해 2학기, 광주의 참상이 대학가에 퍼지던 어느 날 학교 앞 맥줏집에서 인요한은 동기생과 주먹다짐을 했다. “미국은 왜 그따위냐”며 한 친구가 그를 향해 분통을 터뜨린 직후였다. 사실 분통이 터질 사람은 그였다.
계엄군이 광주에 진입하기 이틀 전인 5월 25일. 그는 시민군이 장악한 전남도청에 있었다. 광주에서 들리는 흉흉한 소문은 휴교령이 내려진 뒤 순천에 와 있던 그를 광주로 향하게 했다. 고향친구와 둘이서 미국대사관 직원과 통역을 사칭하며 광주로 들어갔다. 그리고 보았다…. 도청에 몰려 있던 뉴욕타임스 등 외신기자들이 한국말을 유창하게 하는 그에게 시민군과의 기자회견 통역을 부탁했다.
이튿날 고향으로 돌아온 그를 사복경찰로 보이는 두세 명이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좀 이상하다 생각하고 있는데 6월 초, 미 대사관 측에서 그와 아버지를 불렀다. 총영사는 그에게 데모를 주동한 혐의가 있어 한국 정부에서 추방을 요청한다며 나라 밖으로 나가라고 말했다. “내가 잘못한 게 뭐냐. 통역한 게 죄냐. 오히려 미국이 진실을 확인하고 한국 정부에 항의해야 하는 것 아니냐.”
총영사와 30분가량 이야기를 하고 나온 뒤 아버지가 그에게 말했다. “네가 죄가 있든 없든 이 정부는 너를 유죄로 보고 있다. 만약 광주와 같은 항쟁이 어디서 또 터진다면 너는 구치소에 들어갈 거다. 광주가 잠잠해질 때까지 순천에 가서 봉사를 해라. 반항은 그만하고.” 1895년 한국에 발을 디딘 미국 선교사 가족의 3대째인 아버지는 현실적이었다. 인요한은 한국을 떠나기 싫었다. 대전외국인학교를 졸업하고 1978년 미국에서 1년간 살면서 그는 뼈저리게 느꼈다. “미국생활은 정나미가 없어. 그래 가지고 너무 싸늘해. 너무 외로웠어.”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순천중학교에서 매일 영어를 가르쳤다. 사복경찰 한두 명이 늘 그의 집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에서 사람이 찾아왔다. 그는 작심하고 말했다. 나를 괜히 영웅으로 만들지 말라. 추방되면 이 정권 무너질 때까지 혼신의 힘을 다하겠다. 하버드대는 정치적 망명자에 관대해서 정원 외 입학을 시켜줄 거다. 나를 죽일 생각도 말라. 광주에서 만난 외신기자들이 내 이름을 기억해 예의주시하고 있다. 약속을 하나 하마. 날 건드리지 않는다면 5년 동안 광주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겠다.
“거짓말도 좀 섞었지. 그날 이후 2주 동안 살이 5kg이나 빠졌어. 너무 불안해서 방 커튼을 치지 않으면 잠도 못 잤어.” 그해 9월 휴교령은 해제됐다. ○ 전라도의 가치관
1986년 의대 본과 3학년 때였다. 정신과 교수가 두 명씩 짝을 지운 학생들에게 서로 상대방의 정신분석을 해보라는 과제를 줬다. 인요한에게 친구가 분석 결과를 말해줬다. “너는 햄릿하고 돈키호테가 섞여 있는 것 같다. 좀 엉뚱하기도 하고, 로맨틱하기도 하고.” 그 말을 듣고 그는 자신을 좀 더 깊숙이 들여다봤다. 눈이 푸른 미국인, 그러나 전주에서 태어나 순천에서 자라 전라도 사투리를 ‘징허게(많이)’ 쓰는 청년. “너희 나라 가서 미국 시신을 해부해야지” 하는 소리를 해부학시간에 들으면서도, ‘대사관에서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는 거짓말을 해서까지 한국 학생과 똑같이 문무대에 입소해 군대 ‘짬밥’을 먹은 젊은이.
“아, 내가 카멜레온처럼 살았구나. 서양문화권으로 가면 서양문화를 찾고, 한국문화권으로 오면 한국문화를 찾고.”
그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어렸을 때부터 순천시 매곡동에서 “잔이(영어 이름 존·John을 전라도식으로 부른 이름)”로 불리며 온 동네를 헤집고 다니고 열세 살에 대전외국인학교에 입학해서는 부모님이 아니라 친구들이 보고 싶어 엉엉 운 그로서는 고민이 컸다. 게다가 ‘5월 광주’의 기억이 그의 가슴 한쪽에 커다랗게 자리 잡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 해군장교로 참전하고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에도 가담했던 그의 아버지에게 미국은 ‘정의로운’ 국가였다. 합리적인 룰(rule·규칙)이 갖춰진 훌륭한 국가였다. 그러나 그에게 ‘광주, 이후’의 미국은 더 이상 그렇지 못했다. 미국 국내에서 지키는 룰과 외국의 독재자를 지원하는 룰이 달랐다. 이중 잣대. 그래서 마음을 고쳐먹었다. “오늘날까지 이렇게 마음먹고 있어. 나는 나다. 한국인도 아니고 미국인도 아니고. 전라도의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구나.”
그가 말하는 ‘전라도의 가치관’은 추운 겨울밤 군불 땐 온돌방 아랫목에서 배운 것이다. 순정과 의리의 가치관이란다. 옳은 것과 그른 것이 무엇인지, 작물을 언제 심고 언제 걷는지 배웠다. 인간의 올바른 됨됨이를 알고, 살아가는 지혜를 배웠다. 부모뿐만 아니라 동네 어른들이 그의 스승이었다. 열두 살 때인가. 기르던 염소가 개에게 다리를 물려 피를 철철 흘리고 있었다. 불쌍한 마음에 반짇고리에서 실을 꺼내 솥에 넣어 끓여서는 바늘로 꿰매주려 했다. 아버지를 찾아온 동네 어르신이 그에게 말했다. “그리 불쌍하냐?” “너무 불쌍합니다.” “동물도 귀하지만 다치고 굶어죽고 어려운 사람이 세상에는 많단다. 잔이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가 의사가 돼야겠다고 처음 생각한 순간이었다. ○ 나, 반란군
얼마 전 인요한은 한국 국적을 취득해 이제 합법적이고 공식적인 한국인이자 미국인이 됐다. 그런데 그는 스스로를 ‘반란군’이라고 부른다. 그의 가문(린튼·Linton 가문)은 스코틀랜드가 근원이다.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를 상대로 긴 반란의 세월을 보냈다. 그의 어머니 로이스 린튼 여사(87)의 조상은 아메리카 선주민, 코만치 부족이었다. 미국 기병대의 관점에서 보면 역시 반란군이다. 그의 고조할아버지는 남북전쟁에서 남부군으로 참전해 많은 북부군을 사살했다. 승리한 북부군이 볼 때 반란군이다. 그리고 그는 ‘동학의 후손들하고 지낸’ 반란군이자 ‘미국사회에서 뛰쳐나와 버린’ 반란군이다.
“망가질 확률이 99%이고 성공할 확률이 1%인데 난 그걸 해냈단 말이오. 한국 같은 배타적인 사회에서 살아났단 말이여. 하하.”
4·11총선을 앞두고 오지랖 넓은 그는 바쁘다. 후보로 나선 친구와 형님이 적지 않아서 한번 얼굴이라도 비쳐야 하기 때문이다. 한 곳은 민주통합당, 다른 한 곳은 무소속, 또 다른 한 곳은 새누리당이다. “그게 모양새가 좋은 것 같아. 사람한테 치우치지 당한테는 치우지지 않아.”
그에게 지금은 햄릿인지, 돈키호테인지 물었다. “늙어서는 햄릿으로 돼가죠. 나이 들수록 센치해지고(감상적이 되고) 옛날을 그리워하고, 로맨틱해지고. 엉뚱한 행동은 적게 하지.” 그럴 정도로 나이 든 것 같지는 않다고 하자 그가 씩 웃으며 말했다. “아, 시끄러. 열두 살이나 아랫사람이 까불고 있어.” 징헌 전라도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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