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내 인생을 바꾼 사람]최재천을 ‘구원’한 에드먼즈 박사

  • Array
  • 입력 2012년 2월 4일 03시 00분


코멘트

방황의 끝서 1주일 만난 그분, 평생의 은인 되다

서울대 졸업, 하버드대 박사 같은 ‘엄친아’ 이미지와 달리 최재천 교수는 한때 삶의 밑바닥까지 떨어져 봤다. 그는 학생들에게 방황하더라도 책을 손에서 놓지 말라고 당부한다. 뒷 벽면은 전공과 연관된 초충도(草蟲圖)로 꾸몄다. 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서울대 졸업, 하버드대 박사 같은 ‘엄친아’ 이미지와 달리 최재천 교수는 한때 삶의 밑바닥까지 떨어져 봤다. 그는 학생들에게 방황하더라도 책을 손에서 놓지 말라고 당부한다. 뒷 벽면은 전공과 연관된 초충도(草蟲圖)로 꾸몄다. 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 ‘친애하는 조지 선생님. 제가 지금 어디에 와 있는 줄 아십니까?’

1983년 여름, 미국 매사추세츠 주 케임브리지 시 하버드대. 배정받은 연구실에 자리를 잡자마자 타자기에 종이를 끼우고 자판(字板)을 두드렸다.

‘당신이 이야기했던 바로 그 에드워드 O. 윌슨 교수 밑에서 박사 공부를 하게 됐습니다.’

가슴이 터질 듯했다. 우체통에 편지를 넣은 지 이틀 뒤, 그의 자리 전화기가 울렸다.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렸다.

“장하다. 네가 거기 오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정말 잘했다.” 신을 믿지 않는 과학자 최재천(58·이화여대 에코과학부 석좌교수)이 ‘하느님이 내게 보낸 천사’ 라고밖에는 달리 표현하지 못 하는 그 사람. 곤충학자 조지 에드먼즈 박사(1920∼2006·전 유타대 교수)다. 》
○ 방황의 바닥

1년의 재수(再修)와 대학 3년 동안 최재천의 삶을 설명하는 말은 단 하나, 방황이었다. 1972년도 대학입시에서 서울대 의예과를 지원했다 떨어진 충격은 컸다. 글 잘 쓰고, 그림 잘 그리고, 영어와 음악에 조예가 깊은, 반듯하고 착실했던 학생은 재수에 큰 뜻이 없었다.

종로에 있던 재수학원에 아침에 등원(登院)하면 첫 시간이 끝나기가 무섭게 친구와 학원을 빠져나왔다. 음악다방에 죽치고 앉아 음악을 듣고, 2∼3주꼴로 응원한다며 찾아오는 대학 간 친구들과 당구, 볼링을 즐겼다. 혼자서 교외선 기차를 타고 장흥이나 벽제로 가 개울물에 발 담그고 쇼펜하우어의 책에 빠지기도 했다. 특유의 친화력으로 뒷골목 ‘형’들과 자연스레 친해져 나이 많은 여성과 사귀어도 보고, 패싸움에 휘말려도 보고, 유흥비 마련에 남의 돈을 슬쩍해 보기도 했다.

“그냥 무너진 거죠. 자존심도 상하고. 공부를 거부했어요. 거의 염세주의자가 돼서는 ‘될 대로 되라’ 한 거였어요.”

그해 10월 말이었다. 여느 날처럼 당구를 치고 비좁은 계단을 내려오던 그는 고향이 태백이던 고교 친구와 조우(遭遇)했다. “야, 오랜만이다”하며 손을 내밀었지만 그의 뺨에 돌아온 건 친구의 매서운 손이었다. 휘청거리는 그를 지나치며 친구는 “네가 이런 짓 할 놈이냐?”고 쏘아붙였다. 그날부터 입시 공부를 시작했다.

이듬해 다시 서울대 의예과를 쳤지만 예상대로 낙방하고 담임선생님이 억지로 원서에 써 넣은 2지망 동물학과에 붙었다. “삼수를 하겠다”고 했지만 아버지는 “삼수? 너를 보니 싹수가 노랗다. 그냥 다녀라”라고 하셨다. 열패감(劣敗感)에 시달리는 대학 생활이 시작됐다.

전공수업은 결석을 밥 먹듯 했다. 오랜만에 들어간 수업이 시험 날이어서 이름만 적은 백지를 남기고 나오기도 했다. 캠퍼스에 서너 명만 모이면 상주하던 사복경찰이 다가와 흩어놓던 때였다. 납북된 작은아버지가 북에서 당 간부로 있던 터라 군인이던 아버지의 진급은 소령에서 막혔고 어머니는 등교하는 그에게 매일 “데모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데모를 해도 엉거주춤, 골수분자가 되지도 못했다. 어처구니없게도 3학년 때는 학도호국단의 문예부장이 돼서 서너 개의 동아리를 신설하고 관련 직책을 9개나 맡았다. 딴짓의 연속이었다.

앞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을 거듭하던 3학년 겨울방학. 일단 자신이 몸담은 분야가 뭔지는 알아야겠다고 생각하고 발생학 실험실로 들어갔다. 다른 모든 ‘사회생활’과는 하루아침에 이별을 고했다.

그렇게 매일 실험실 바닥을 쓸고, 실험기기를 닦고, 실험용 쥐 스무 마리의 배를 갈라 난소를 적출하고 배양하며 지내던 1976년 봄, 어느 날이었다. 키가 훌쩍한 백발의 미국인이 문을 열고 들어와 물었다. “누가 자에 춘 초에(Jae Chun Choe·최재천의 영어식 표기)입니까?” 일주일 뒤 모든 게 바뀌었다.

○ 한 줄기 빛

그 미국인은 하루살이 연구로 유명한 조지 에드먼즈 박사였다. 그는 그 전해에 서울대에 교환교수로 와 동물학과에서 강의한 김계중 박사(전 펜실베이니아주립대 교수)의 지인이었다. 최재천이 거의 유일하게 제대로 들은 수업이 김 박사 수업이었다. 영어 강의에 호기심이 발동한 것이다. 영어에는 자신 있던 그는 열심히 참여했고, 김 박사는 좋은 인상을 받았다.

세계 곳곳으로 하루살이 유충 채집여행을 다니던 에드먼즈 박사의 다음 목적지는 한국이었다. 마침 한 학회에서 우연히 김 박사를 만나 한국에 간다고 하면서 조수를 구한다고 했더니 김 박사가 잊지 않고 최재천을 소개한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여러 우연이 겹친 거죠. 그분이 그때 다른 나라를 가셨어도 됐을 텐데 왜 한국이었을까. 학회에서 어떻게 김 박사와 마주쳤을까….”

흔쾌히 조수가 됐다. 그가 조수석에 앉아 지도를 보고 길을 가리키면 에드먼즈 박사는 운전을 했고, 금발에 푸른 눈의 부인은 뒷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사실 지도는 그리 필요 없었다. 에드먼즈 박사는 눈에 띄는 시내가 보일라치면 차를 길가에 급하게 세우고는 신발도 벗지 않고 바로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돌을 뒤집어 붙어 있는 하루살이 유충을 긁어 조그만 시약병에 넣었다. 채집에 최적인 장소를 만나 시간이 오래 걸리면 부인은 나무 그늘에 접는 의자를 펴고 앉아서 책을 읽었다.

일주일을 따라다니면서 그는 ‘참 별놈의 영감님도 다 있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연구하러 왔다지만 외국에 왔는데 관광을 단 한 시간도 안 하다니…. 결국 마지막 날 방문할 계획이었던 용인 한국민속촌도 가는 길목의 개울에서 유충 채집을 하다 가지 못했다.

그날 저녁 서울 조선호텔 라운지에서 둘은 맥주를 앞에 두고 마주 앉았다. 정말 궁금했던 그가 물었다. “왜 여기까지 와서 개울물만 첨벙거리고 가는 건가요?” 몇 번 다시 묻자 그제야 이해가 된다는 듯 에드먼즈 박사가 파안대소를 하며 말했다. “우리 집은 산중턱에 있는데 밤에는 도심의 야경이 거실에서 잘 보이지. 겨울에는 스키를 타고 학교를 가고 플로리다 바닷가에 별장도 있지. 아름다운 부인도 있다네. 나는 하루살이 채집을 하러 세계를 돌아다니지. 자네 나라가 102번째야.”

그 순간 최재천의 머릿속이 환해졌다. 방학 때마다 고향 강릉에 가서 산으로 바다로 계곡으로 돌아다니며 자유인을 꿈꾸던 그였다. ‘김찬삼의 세계여행기’를 읽으며 벽과 천장에 세계지도를 붙이고 자신만의 여행 경로를 그려보던 그였다. 나이를 먹어가며 일과 즐거움이 함께할 수 없다는 현실에 절망하던 그에게 에드먼즈 박사는 통쾌한 반전이었다.

“결론이 난 거였어요. ‘이분은 놀면서도 잘 사네. 그럼 되겠네.’ 어떻게 하면 선생님처럼 살 수 있느냐고 염치 불고하고 물어봤죠. 그랬더니 미국으로 유학을 오라고 하시더군요.”

에드먼즈 박사는 공책에서 찢은 백지에 영어로 ‘1. 하버드대 에드워드 O. 윌슨 교수’라고 썼다. 그러면서 그를 힐끗 보더니 “아, 너보고 꼭 (여기를) 가란 말은 아니다. 그래도 좋은 순서대로 알려줘야지”라고 말했다.

뒤 이어 미국에서 갈 만한 대학과 배울 만한 교수 이름 여덟 개를 더 써서 그에게 건네줬다. 그에게 목표가 생겼다.
▼ 고교 돌며 ‘아름다운 방황’ 강연, 인생스승에 진 빚 갚는 중 ▼

○ 인생의 빚

그 순간 그의 삶은 180도 달라졌다. 방황하고 엎치락뒤치락하던 인생에 갑자기 일직선으로 달릴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이후 그는 좌고우면하지 않았다. 공부에 매진했다.

에드먼즈 박사는 이후 “일주일간 조수로 두고 보니 이 친구는 뭔가 일을 저지를 것 같다. 배우는 속도가 엄청나게 빠르다”는 호의로 가득한 추천서를 써줘서 그에게 유학의 길도 열어줬다. 1983년 미국 조지아에서 열린 학회에서 그와 재회한 에드먼즈 박사는 아들을 대하듯 그의 손을 부여잡고 일일이 지인들에게 소개해줬다. “얘가 윌슨의 제자인데 내가 한국에서…” 손에 맺힌 땀만큼 정이 물씬 느껴졌다.

그러나 2006년 3월 어느 날 최재천은 연구실 의자에 앉아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에드먼즈 박사가 타계했다는 소식을 들은 직후였다. “너무 죄송했어요. 편찮으시다는 걸 알았지만 가 뵙지를 못했어요. 제가 너무나도 큰 빚을 진 분인데….”

그는 요즘 전국의 고등학교를 돌아다니며 강연하는 걸 소중하게 여긴다. 시간도 많이 걸리고 수입은 없지만 보람은 비할 바 없다. 그는 학생들에게 방황하되 방탕하지는 말며, 방황하면서도 자신이 뭘 하면 좋을까 찾고 뒤져보고 읽어보는 ‘아름다운 방황’을 하라고 권한다. 남이 가라는 길로 가지 말고 스스로 찾아라, 길이 보인다면 달려가라고 말한다. “인생의 전환점을 젊은 친구, 단 한 사람에게라도 만들어 줄 수 있다? 어마어마한 거죠.” 에드먼즈 박사에게 진 빚을 최재천은 이제 조금씩 갚아가고 있다.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O2#인터뷰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