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서울 여의도 KBS 공개홀 출연자 대기실 앞. 트레이닝복 차림의 키 작은 남자가 외발자전거 연습에 여념이 없었다. “일산에서 여의도까지 이걸 타고 다니는 사람도 있다는데 왜 이렇게 안 되냐….”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땀을 뻘뻘 흘리며 연습을 거듭하는 이 남자, ‘달인’ 김병만(36)이었다. “1년 전부터 차 트렁크에 넣고 다녔는데 제대로 연습을 못했어요.”
13일 ‘달인’ 마지막 방송에서 외발자전거 묘기를 선보인 ‘사륜’ 김병만 선생. 그는 녹화 현장에서 외발자전거를 탄 채 줄넘기를 하는 고난도 연기를 NG 없이 해내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KBS 화면 캡처 이날은 김병만이 3년 11개월 동안 이끌어 온 KBS 개그콘서트의 최장수 코너 ‘달인’의 마지막 녹화일. 13일 방송을 끝으로 시청자들은 더는 ‘달인’을 볼 수 없다. 2007년 12월 9일 ‘달인을 만나다’라는 이름으로 한국와인감별사대회 우승자와 5대 명창 판소리의 달인을 소개한 이 코너는 2회부터 ‘달인’이라는 이름으로 정착됐다. 3회에서 ‘16년 동안 단 한 번도 변을 보지 않으신 무변 김병만 선생’을 선보이면서 ‘16년 동안…’이라는 소개 형식도 유지해 왔다. 기억력의 달인 깜빡 선생, 발음의 달인 버벅 선생, 여자를 돌보듯 하는 부킹 선생, 집중력의 달인 야동 선생 등 260가지가 넘는 달인이 등장했다. 그 사이 무명의 김병만은 2010년 KBS 연예대상 코미디 부문 남자 최우수상을 받은 ‘개그계의 달인’이 됐다.
○ “분위기 좋을 때 떠나겠다”
‘달인’ 선생의 마지막 날을 보내는 감회를 물었다.
“슬프지는 않아요. 개콘을 12년째 해오면서 매번 코너를 끝낼 때마다 시원섭섭하긴 했죠. ‘달인’은 유난히 길었기 때문에 털고 새로 시작하는 시간이 좀 길어지긴 할 것 같아요.”
‘달인’의 막을 내리게 된 데 대해 그는 “박수칠 때 떠나고 싶었다”고 했다. “지금이 딱 좋아요. 후배들이 잘 해주고 있어 분위기가 좋죠. 이 분위기 속에 다른 걸 준비할 수 있고, (그만두는 데 대한) 심적 부담도 덜합니다.” 개콘의 시청률은 최근 5주 연속 20%를 넘었다(AGB닐슨미디어리서치 자료).
그는 가장 기억에 남는 달인으로 ‘달인쇼’를 꼽았다. 달인이 다시 ‘붐업’하는 기점이 됐기 때문이다. 지난해 9월 추석특집으로 방송된 달인쇼에서 그는 링에서만 살아온 양파 김병만 선생, 수족관에서 잠수한 채로 살아온 전복 김병만 선생 등을 선보였다. 이 달인쇼는 ‘The Master Show’라는 영어명으로 국제 에미상 비대본 엔터테인먼트 부문 결선에 올랐다. 수상작은 21일 미국 뉴욕에서 열리는 시상식에서 발표된다.
‘달인’은 ‘동작 그만’(3년 3개월)을 제치고 개콘의 최장수 코너라는 기록을 세웠다. 사회자 역의 류담(32)은 “이렇게 오래가는 코너는 다시 나오기 힘들 것”이라고 했다. “서운하다. 겉으론 웃는데 오늘은 다들 멍해 있는 것 같다. 이렇게 오래한 코너는 처음이라 그렇다.” ‘달인’의 수제자 노우진(31)은 “소재를 풀어내는 아이디어보다 다루지 않았던 소재 자체를 찾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고 되돌아봤다. 개콘의 연출자 서수민 PD(39)도 “어떻게 그런 소재를 매주 찾는지 대단했다”고 말했다.
김병만에게 ‘달인은 인생 최고의 선물’이다. “달인을 하기 전에는 무대에서 울렁증이 심했어요. 지금은 과감하게 내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자신감이 생겼죠. 연예인들은 밖에 다닐 때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리기도 하는데 저는 그렇게 감추는 것이 싫고 어색해요. (달인으로 뜬 이후) 다른 사람들은 변했다고 느낄 수도 있겠지만 제 스타일은 전혀 변하지 않았어요. 여전히 트레이닝복과 운동화 차림으로 다니죠.”
○ “땀 냄새 나야 뭔가 하는 것 같다”
김병만이 이끄는 ‘달인’팀이 9일 마지막 녹화를 끝내고 대기실에 모였다. 사회자 류담(오른쪽)은 “웃고는 있지만 속은 멍하고
섭섭하다”, 수제자 노우진(왼쪽)은 “많이 힘들었던 만큼 시원섭섭하다”고 했다. 홍진환기자 jean@donga.com ‘달인’이 보여준 코미디는 땀내 풀풀 나는 정직한 도전의 결과물이었다. 매주 한 번씩 백지 상태에서 시작해 달인으로 성장하는 모습에 시청자들은 박수를 보냈다.
“땀 냄새가 나야 뭔가 하는 것 같아요. 그게 김병만 스타일이죠. 달인에서 필요한 소품은 소품실에 의뢰하지 않고 일일이 제가 다 만들어 왔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다 만든다는 자체에 뿌듯함을 느낍니다. ‘철사공예의 달인’ 때는 철사 비키니와 가발, 우산 등 소품을 준비하는 데만 4일이 걸렸어요. 이런 부분을 많은 분이 느꼈기 때문에 박수를 보내주시는 게 아닐까요. 열심히 하잖아요.”
개그맨으로서 그의 개인사 역시 바닥에서 출발해 정상에 오른 땀내 나는 과정이었다. 전북 완주군 화산면에서 태어나 고교 졸업 전부터 공사판에서 일했다. 스무 살에 30만 원을 들고 서울에 와 스물일곱에 KBS 공채 개그맨이 되기까지 서울예전 입시 여섯 번, 백제대 입시 세 번, MBC 개그맨 공채시험 네 번, KBS 개그맨 공채시험에 세 번 떨어졌다.
“살다 보면 두드려도 안 열릴 때가 있죠. 어떻게 보면 좀 미련한데, 저는 열릴 때까지 두드립니다. 어떤 사람들은 앞에 얼음판이 있으면 ‘저걸 밟으면 깨질까? 안 깨질 수도 있는데…’ 하며 긴 시간 고민하죠. 저는 가서 일단 한번 밟아 봐요. 깨지면 돌아가고 아니면 그냥 갑니다. 망설이는 시간을 줄이고 빨리 부닥쳐봅니다. 자기가 진정 좋아한다, 꿈을 갖고 있다, 절실하다, 그런 게 있으면 포기하지 않아요. 어떻게 해서라도 쟁취하고 싶은 게 저의 성격이죠.”
그는 ‘달인’뿐 아니라 다른 프로그램에서도 도전적 코미디를 시도해왔다. KBS ‘코미디쇼 희희낙락’(2009년)의 ‘김병만은 살아있다’ 코너에선 초고속 카메라로 찍은 격파 장면 등 몸 개그로 눈길을 끌었다. 올해 SBS ‘김연아의 키스&크라이’에서는 피겨스케이터에 도전해 출연팀 중 2위를 차지했다.
현재 출연 중인 SBS ‘정글의 법칙’은 정글에서 맨몸으로 살아남는 ‘리얼 서바이벌’ 프로그램. 그는 칼 하나로 물고기 30마리를 잡아 일행을 먹이고 각종 도구를 개발해 집과 화장실을 짓는 등 ‘도구적 인간’의 진수를 보여준다. 이러한 노력은 ‘김병만 코미디’로 학술논문의 분석 대상이 되기도 했다.(신수아 씨의 한양대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인물을 통해 살펴본 한국 슬랩스틱 코미디의 특성연구: 코미디언 ‘김병만’을 중심으로’)
○ ‘도전의 달인’은 계속된다
마지막 달인은 외발자전거의 달인 ‘사륜’ 김병만 선생이었다. 스태프가 마지막 무대장치를 준비하는 사이 김병만은 무대에 올라 관객들에게 “마지막 코너라죠? 근데 이 뒤로도 50개 더 있으니까 다 보고 가세요. 야! 못 가게 문 닫아라”며 농담을 던졌다. 객석에서 “얼굴이 까맣다”는 말이 나오자 “여기서 SBS 얘기하면 혼나요. 분장 진하게 한 거예요. 절대 거기 다녀와서 탄 거 아니에요”라며 웃었다. 그는 파푸아뉴기니에서 ‘정글의 법칙’을 녹화하고 달인의 마지막 녹화를 사흘 앞둔 6일 귀국했다. 열대의 햇볕에 온몸이 새까맣게 그을렸다.
이날 녹화는 NG 한 번 없이 끝났다. 외발자전거를 탄 채 줄넘기를 하는 모습에 서수민 PD조차 리허설 도중 “내가 봐도 불안하다”며 마음을 졸였지만 단번에 성공했다. 녹화 말미에 그는 “여러분이 저를 키워주셨습니다. 진심으로 큰절 올립니다”라며 마지막 인사를 했다. 후배들은 달인팀 세 명을 차례로 헹가래쳤다.
녹화를 마치고 나온 김병만의 표정은 밝았다. 기자에게 “오늘 녹화 어땠어요?”라고 물은 뒤 “말 그대로 박수칠 때 떠나는 것 같았다. 맨 마지막에 녹화해서 관객들이 지칠 만도 한데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지켜봐 줬다”며 만족해했다. 피곤하지 않은지 물었더니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웃음소리를 마시는데 어떻게 피곤할 수가 있나요. 웃음소리는 제게 최고의 보약입니다.”
‘달인’ 이후의 활동 계획에 대해 김병만은 “포장은 다르지만 뭔가 도전이 있는 캐릭터로 드라마 등 다양한 분야에서 시청자들을 만나게 될 것 같다”고 했다.
“제 속에 있는 모든 걸 끄집어내 보여드렸어요. 더 보여주면 초라할 것 같아서 여기서 일단 내리지만 언젠가 또 다른 달인을 보여드릴 겁니다. 코미디는 영원히 저의 기본입니다. 죽을 때까지 코미디를 해 기타노 다케시나 찰리 채플린처럼 희극인 김병만으로 기억되고 싶은 마음은 변함없어요.”
그는 정글에 사는 원주민 앞에서 슬랩스틱 코미디를 보여줬더니 배를 잡고 웃더라는 일화를 전하면서 ‘웃음의 원초성’을 느꼈다고 했다.
“국경과 언어를 넘는 개그를 하고 싶어요. 기회가 되면 일본이나 미국에 진출해 언어가 통하지 않는 사람들까지 웃기고 싶어요.” 그는 일본 소극장 공연을 위해 틈틈이 일본어를 배워 왔고 자신만의 개그 전용관을 짓기 위해 건국대 건축공학과 대학원에서 구조설계를 배우고 있다.
개콘의 달인은 끝났지만 달인 김병만 선생의 도전은 끝나지 않았다.
곽민영 기자 havefun@donga.com :: 김병만 약력 ::
―1975년 7월 29일 전북 완주군 화산면 출생 ―백제예술대 방송연예과 졸업 ―건국대 대학원(건축공학) 재학 중 ―KBS 공채개그맨(17기) ―KBS ‘개그콘서트’(2000∼2011년) ‘코미디쇼 희희낙락’(2009년) ‘개그스타’(2010) ―드라마 ‘종합병원2’(2008년) ‘아테나: 전쟁의 여신’(2010년) ―영화 ‘선물’(2001년) ‘조폭마누라’(2006년) ‘김관장 대 김관장 대 김관장’(2007년) ‘서유기 리턴즈’(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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