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한수산의 동토의 민들레, 사할린 동포]<1>사할린 한인묘지 조사현장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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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8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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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 동포 슬픈 역사 가슴을 저리게 하는데
묘비 가린 자작나무는 왜 이다지도 푸르른지…

한맺힌 묘비에 햇살을… 유일한 여성 조사원인 이은영 씨가 묘비에 ‘김복기, 1933.3.1∼1985.11.22’라는 글씨가 선명한 한인 여성의 묘지 상태를 살펴보고 있다. 한수산씨제공
한맺힌 묘비에 햇살을… 유일한 여성 조사원인 이은영 씨가 묘비에 ‘김복기, 1933.3.1∼1985.11.22’라는 글씨가 선명한 한인 여성의 묘지 상태를 살펴보고 있다. 한수산씨제공
《 국무총리 산하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가 일제강점기 러시아 사할린으로 강제동원됐던 한인들의 묘역에 대한 실태조사를 벌이고 있다. 사업을 위탁받은 지구촌동포연대(KIN) 소속 조사원들은 7월 3일부터 조사에 나섰으며 10월 최종 보고서가 나올 예정이다. 한수산 씨(작가·세종대 교수)가 광복 후 최초로 이뤄진 이번 실태조사 현장 등을 취재하고 귀국했다. 취재기를 3회에 걸쳐 연재한다. 》
한인 동포들의 묘비는 돌보는 이가 없어 군데군데 깨지고 상한 곳이 보였다. 한수산씨제공
한인 동포들의 묘비는 돌보는 이가 없어 군데군데 깨지고 상한 곳이 보였다. 한수산씨제공
아침부터 쏟아지는 폭우에 갇혀, 사할린으로 떠나는 비행기는 1시간여를 활주로에 대기하고 있었다. 빗물이 흐르는 창에 이마를 기대며 생각했다. 어디에, 얼마나 더 많은 민족의 한과 멍울이, 과거사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어야 하는가.

그러나 역사의 트라우마를 찾아 비통함 속에 떠났던 다른 취재여행과는 다르게 나는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끌려가 돌아오지 못한 채 사할린에서 숨진 한인들의 묘지를 조사해 자료를 데이터화하는 작업이 건국 이후 최초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 조사는 유해를 고국으로 송환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는 첫 삽을 뜨는 작업이기도 하다. 질곡의 한 시대를 마감하고 희망과 약속의 뜻을 심는 그 현장을 찾아간다. 사할린 한인사의 원년이 되어, 그 기민(棄民)의 역사에 마침표를 찍는 첫걸음을 함께하는 것이다.

서울을 떠난 지 3시간, 비행기는 사할린의 주도 유즈노사할린스크 공항에 내렸다. 이 여름 사할린은 일교차가 심하다. 한낮이면 몸을 못 가누게 땀이 흐르지만 아침의 체감온도는 11월처럼 춥기까지 하다. 다음 날, 배덕호 지구촌동포연대 대표와 함께 제1묘지 작업 현장에 도착했다. 기가 질린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었던가.

▼ 잡목 쳐내자 드러난 얼굴… “귀국선이 왔는가” 말을 건네네 ▼

묘지는 묘지인데, 자작나무 숲 속으로 풀이 우거져서 묘비가 보이지 않는다.

조사단이 작업을 하고 있다는 구역까지 찾아갔지만 숲 속 어디에 있는지 그들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는다. 전화로 연락을 하고 통행로에서 기다리니 조사원들이 숲 속에서 나온다. 얼굴은 환하게 웃는데 그 모습들이 말 그대로 영화 속 특수임무를 수행 중인 요원들 모습이다. 갈색 방충복을 뒤집어쓰고 긴 장화를 신었다. 손에는 반달형의 러시아 낫이 들려 있다.

나 또한 조사원들의 뒤를 따라 풀숲을 걷고 또 걸었다. 숨 막히게 습한 열기 속으로 꽃가루처럼 모기 떼가 날아든다. 햇살이 들지 않는 자작나무 숲 속, 가슴 높이로 자라 무성한 풀, 땀으로 온몸이 젖고, 걸치고 있는 옷이 젖는다.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는 한인 묘지들, 비문을 읽지 않고도 러시아인 묘와 한인들의 묘는 구별되는 특징이 있다. 한인 묘지는 묘비를 봉분 앞에 세우는데 러시아인들은 묘비를 봉분 뒤에 세운다.

○ 귀국선을 기다리며 하나둘씩 사라지다

키릴 문자로 쓴 이름 밑에 ‘리도길’이라고 한글로 적은 묘비에는 1907년에 태어나 1984년에 세상을 떠났다는 숫자뿐, 비문이 없다. 이름도 없이 오직 사진뿐인 묘비도 있다. 단지 ‘고영양남씨지묘’라는 글자만을 적은 묘비도 보인다. 故南珍希之墓(고남진희지묘)라고 시멘트 기둥에 새기고 갓을 씌운 묘비에는 묘주가 ‘모주’라고 잘못 적혀 있다.

KIM이라고 새긴 묘비가 보였다. ‘아, 이것도 한인 묘지구나’ 하면서도…. 키릴 문자로 쓴 비명을 읽을 수 없는 나는 숫자만으로 그가 1985년에 세상을 떠났다는 것만을 겨우 확인한다. 광복을 맞았지만 조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이 일본에 의해 이 땅에 버려져야 했던 사람들, 귀국선을 기다리며 이들은 추위에 얼어 죽고, 굶어 죽고, 미쳐서 죽어 갔다고 했다. 냉전시대의 분단 조국도 애써 그들을 외면한 채 세월이 흘러갔다.

사할린의 과거는 과거가 아닌 현재진행형이었다. 저 비석의 사진들이 겨울을 지나며 얼어 터져서 떨어져 나갔듯이, 이제 또 과거를 미래완료형으로 묻어 두어서는 안 된다. 지난 역사는 가슴을 저리게 하는데…. 앞을 가린 자작나무는 왜 이다지도 푸르게 너울거리는가. 고개를 드니, 묘지 위 하늘을 슬픔의 조각처럼 까마귀가 떼를 지어 날고 있었다.

○ 농장-학업 놓고 봉사하는 조사원들

“풀에 덮인 묘들이 어둡지요. 거길 뚫고 들어가서 나뭇가지를 쳐내고 풀을 깎고 나면 쏴아 하고 소리가 나듯이 햇살이 묘지로 비쳐 듭니다. 그때는 참 기쁘지요. 이분들에게 빛을 되찾아주고 있다는 그런 느낌일까요.” 서병철 책임조사원과 이야기를 나누며 땀 냄새가 뒤엉킨 몸으로 숙소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서자 현관을 가득 메우고 있는 장화, 등산화가 이들의 고된 하루를 말없이 이야기한다.

조사원들은 연령도 전공도 다양하다. 자려고 누우면 눈앞에 풀들이 너울거리고 잠이 들어도 풀을 자르며 나가는 꿈을 꾸게 되더라는 이은영 씨(35·KIN 간사)는 유일한 여성조사원이다. 마음먹고 조선낫을 가지고 현장으로 떠난 김기열 씨(48)는 괴산에서 친환경농장을 운영한다. 캐야 할 감자들을 놓아두고 여기까지 와 현장을 지휘하고 있다. 다부진 체격에 수염까지 기른 윤병호 씨(36), 그의 전공 분야는 애니메이션이다. 묘지의 번호를 따라가며 사진을 찍고 주변 상황을 기록하는 이은규 조사원과 사회복지학 전공의 대학생 오민섭 조사원은 20대다.

왜 이들은 여기까지 왔는가. 세속의 꿈을 ‘나 하나’가 아닌 ‘우리 모두가 함께하는 역사’에 바친 가슴으로 모여든 사람들, 이런 정신과 의지를 묶어 조사원들은 묘지의 숲을 헤쳐 나아가고 있었다.

“‘여기서 수십 년, 고향 갈 날을 기다리며 누워 계셨다 생각할 때 우리가 빠뜨리고 놓치면 기다리던 버스가 떠나버리는 격이 아닌가.’ 이런 마음으로 현장을 누비고 있습니다.” 서병철 씨의 말이다. 7월 11∼14일에는 오병주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 위원장이 현지를 찾아와 이들 조사원을 격려하고, 사할린 주정부를 방문해 묘지 실태조사에 대한 긴밀한 협의를 한 뒤 한인 동포들의 의견을 청취하고 돌아갔다.

귀향에의 꿈이 서린 유해를 한 조각 한 조각 거두어 고국으로 모시고 돌아가는 날, 사할린에 묻힌 분들이 그렇게도 기다리고 또 기다렸던 귀국선의 희망도 거기 담기리라. 이분들의 절절했던 염원을 모아 사할린 어느 언덕에 위령탑과 분향소를 세우고 한 줌의 향을 피워 올릴 그날은 언제일 것인가.

○ 묘 특징 상세히 적고 GPS 좌표 확인

조사원들의 작업 진행은 고된 탐색조사부터 시작된다. 발견된 한인 묘지 안의 풀을 정리하고, 묘비 철책과 주변의 나무에 테이프를 감아 표시를 한 후 일련번호를 적는다. 이후 2차 조사에서 묘지의 사진을 찍고, 조사표에 묘비의 내용을 기록한다. 3차로 현장을 지도로 정리해 자료를 만든다. 오차범위가 1m 이내인 첨단 장비 ‘LEICA ZENO 10’을 이용해 위치를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 좌표로 정리하는 것도 이때다. 전자지도에 묘지의 위치값이 실시간으로 저장된다. 유족들이 묘지를 찾을 때를 감안하여 주변 지형지물의 특성도 자세히 기록한다.

이렇게 마련되는 조사 결과를 가지고 위원회는 사할린 강제동원 관련 자료와 대조해 사망 및 행방불명 건들에 대한 판단 근거로, 궁극적으로는 유골봉환사업의 기초자료로 활용할 예정이다. 또한 이번 조사를 시작으로 5년에 걸쳐 사할린의 모든 공동묘지 21곳에 대한 전수조사가 이루어지게 된다.
▼ 일제, 패전후 한인 징용노동자 동토에 버려 ▼

열정 다하는 조사원들 나이도 하는 일도 제각각인 조사원들은 지나간 역사에 대한 뜨거운 가슴 하나로 낯선 땅 사할린에서 귀한 시간을 바치고 있다. 왼쪽부터 김기열 오민섭 이은규 이은영 윤병호 조사원. 한수산 씨 제공
열정 다하는 조사원들 나이도 하는 일도 제각각인 조사원들은 지나간 역사에 대한 뜨거운 가슴 하나로 낯선 땅 사할린에서 귀한 시간을 바치고 있다. 왼쪽부터 김기열 오민섭 이은규 이은영 윤병호 조사원. 한수산 씨 제공
러시아 연해주 동쪽, 일본 홋카이도 북쪽에 위치한 러시아연방 사할린은 일본에서는 가라후토(樺太)라고 부르는 세계에서 19번째로 큰 섬이다. 면적은 8만7100km²로 남한보다 조금 작다.

1799년 일본의 에도 막부가 사할린 섬 남부의 통치를 시작했으나 1853년 러시아 제국이 영유를 선언한다. 이후 러일 양국의 ‘협동 관할지’를 거쳐 1875년에는 러시아 영토가 됐다. 그러나 1905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북위 50도 이남의 사할린 섬 남부가 일본의 통치 아래 들어가고 1918년에는 일본군이 사할린 섬 북부 전역을 점령하기에 이른다.

일본은 이후 ‘모집’ ‘관알선’ ‘징용’ 등의 이름으로 한인들을 사할린에 강제로 끌고갔으며 그 수는 1941년 5만, 1942년 11만, 1943년에는 12만 명에 이르렀다. 탄광, 벌목장 등에서 중노동에 시달리며 고통 속에 살아야 했던 한인들에게 1945년 8월 15일은 광복이 아니라 새로운 비극의 시작이었다. 일본의 패배에 따라 사할린을 비롯한 4개 섬이 러시아로 귀속되자 일본은 27만 명의 자국민만 본국으로 귀환시켰고, 한인들은 일본 국적이 아니라는 이유로 사할린에 방치했다.

귀국선을 기다리며 광복 후에도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이들에게, 소련과는 국교조차 없었던 조국 대한민국도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그 가운데 일본인 처를 둔 일부가 일본으로 귀환했고, 더러는 러시아 대륙으로 이주하거나 북한행을 택하기도 했다.

한수산 작가·세종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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