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지문을 확대해 논밭의 이랑처럼 표현한 작품 앞에 선 이철수 씨. 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
언덕배기 다랑논처럼 정답게 이웃한 붉은 이랑들 사이에서 일하는 남자. 해질 녘 고된 일과를 마치고 돌아가는 나이 든 농부가 슬그머니 말을 건넨다. “술 한잔했어, 이해해!”
시골의 일상을 포착한 그림과 마주치는 순간 가슴이 따스해진다. 자세히 보니 이랑은 지문을 확대한 이미지다. 바로 판화가 이철수 씨(57)의 지문이다. 그는 “밭은 지문이자 존재이자 인생이라 생각한다. 그 속에 힘들게 살아온 농부의 삶이 녹아 있다”고 말했다.
서정적 목판화가로 대중과 친숙한 그가 서울 종로구 관훈동 관훈갤러리(02-733-6469)에서 12일까지 ‘새는 온몸으로 난다’전을 연다. 1981년 첫 개인전을 연 갤러리에서 화업 30주년을 기념하는 초대전을 마련한 것. 80년대 민중판화운동에 앞장선 시절부터 90년대 이후 내면을 성찰하고 생명의 본질을 탐구하는 판화까지 두루 선보였다.
“30여 년 작업하면서 10년 가까이 데모에 그림을 대줬고 20년은 마음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사회에 필요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다는 점에서 내 작업은 크게 달라진 바 없다.”
전시 제목에 대해 그는 이렇게 찬찬히 설명했다. “새는 좌우의 날개가 아니라 온몸으로 난다. 이념갈등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데 논의 자체는 공소해지고 사람들이 사랑으로 서로를 받아들여 이해하고 용납하는 태도는 사라져 버렸다. 또 ‘온몸’은 진정한 존재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존재의 실상, 마음에 관한 이야기도 해야 할 시점 아닌가.”
충북 제천에서 농사지으며 삶의 언저리에서 길어 올린 소박한 그림과 글은 차진 화음을 자랑한다. ‘허영이 그렇지/분노가 늘 그렇지/택배하는 사람처럼/제 것 아닌 걸/제가 들고 분주하게’ ‘땅콩을 거두었다/덜 익은 놈일수록/줄기를 놓지 않는다/덜된 놈/덜떨어진 놈!’
부드러우면서 톡 쏘는 맛이 있다. “깊은 자기 성찰 없이, 나 자신에 대한 이해 없이 세상과 남을 이해하는 것도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기계처럼 차가워지는 나 스스로를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자각도 들었다.” 이런 생각으로 2002년 10월 온라인에서 시작한 ‘나뭇잎 편지’의 회원 수는 6만 명이 넘었다.
그림 그리느라 농사엔 뒷짐 진 줄 알지만 실상은 다르단다. “그림에는 잘 그리려는 생각, 남에게 칭찬 들으려는 계산이 생긴다. 농사는 그런 게 없다. 계절에 머슴 사는 기분으로 농사를 짓는다. 그 단순한 흐름 속에 내 삶의 리듬을 맞추려 애쓰는 것, 해보면 괜찮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