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정상급 패션 디자이너인 ‘미스지 컬렉션’의 지춘희 대표(오른쪽)가 지난달 28일 서울패션위크 피날레 쇼 직전 백스테이지에서 모델들과 함께 섰다. 사진 제공 미스지 컬렉션
올해로 10주년을 맞은 서울패션위크 피날레 무대의 주인공은 국내 최정상급 패션 디자이너 지춘희 씨(56·‘미스지 컬렉션’ 대표)였다. 지난달 28일 서울 강남구 대치동 서울무역전시장(SETEC)에서 열린 그의 패션쇼를 찾아갔다.
기자가 그와 가깝게 왕래한 지도 10년. 그의 쇼는 ‘아, 여자라서 행복하다’는 느낌을 준다. 그의 옷은 ‘갖춰 입어야’ 하는 날 꺼내 들게 된다. 때로는 유혹하는 여성 같고, 때로는 조신한 여성 같은 상반된 두 얼굴을 지녔다. 그뿐인가. 그의 마당발 인맥은 정·재계, 문화계를 아우른다. ‘지춘희 파워’는 어디서 나오나. 그의 올해 패션쇼를 들여다봤다.
○ 여행
노란색 데이지꽃 모양 장식, 인어를 연상시키는 보라색 러플이 달린 드레스, 푸른색 꽃무늬 원피스, 부드럽게 반짝이는 스팽글 톱과 치마…. 맨 마지막에 모델들은 옥빛 풍선을 가득 손에 들고 나왔다가 허공으로 흩뿌렸다.
두 달 전 전화를 걸었을 때 그는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을 여행하고 있었다. 지중해의 섬 풍경이 이번 무대로 옮겨 온 것이다. 쇼 시작 두 시간 전 리허설 때 그의 곁에서 물었다.
―왜 옥빛 풍선인가?
“바다도 되고, 하늘도 되고…. 바다, 모래, 들꽃, 그런 자연을 담고 싶었다. 원하는 빛깔을 내기 위해 옷감은 손으로 일일이 염색했다.”
―반짝이는 스팽글을 많이 썼는데….
“이젠 (금융위기 여파에서 벗어나) 밝은 분위기를 한껏 드러내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데이지 꽃 장식은 왜….
“강원 평창군 용평면 들녘에 데이지가 한 아름 피었던 게 생각나서. 요즘엔 해외여행보다 용평이나 제주 같은 국내여행이 더 좋다.”
○ 여자
올여름 그와 함께 경기 양평으로 나들이를 갔을 때, 그는 허리선을 엉덩이 부근으로 내려 조인 풍성한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만들어 봤어.” 패션 디자이너는 ‘요이, 땅’ 하면서 옷을 만드는 게 아니다. 평소 부단히 만들어보는 것이다. 그 때 그 블라우스도 이번 쇼에 나왔다. 다만 펑퍼짐하지 않도록 미니스커트와 매치했다. 편안함과 긴장의 공존. 이것도 ‘지춘희 스타일’이다.
지 씨는 여성이 어떻게 웃고 어떻게 옷을 입어야 매력적인가를 직감적으로 아는 것 같다. 이번에 모델들은 얇은 흰색 양말을 파스텔 또는 빨간색 하이힐 속에 신었다. “여자가 맨발을 보이는 건 부끄러운 일 같아. 살짝 가려야 미덕이지.”
최근 세계적 패션 브랜드들도 하이힐 속에 양말을 받쳐 신는 이른바 ‘양말 패션’을 선보이긴 했다. 그런데 두꺼운 니트 소재에 전위적 디자인이라 딱 남자가 달아나게 생겼다. 새초롬한 그믐달 같은 지춘희 스타일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렇다고 지 씨가 ‘공주 과’인가 하면 전혀 ‘아니올씨다’다. 여성의 몸을 아름답게 보이게 하는 곡선 실루엣은 늘 정돈돼 있어 은근한 고집도 느껴진다. 그는 자주 말한다. “여자들이 신문을 읽고 교양을 갖춰야지.”
○ 인생
‘바쁜’ 스타 하객들은 쇼 장에 으레 지각을 한다. 그러나 지 씨의 하객들은 일찌감치 도착해 백스테이지를 들렀다. 아내의 녹화 일정 때문에 이번엔 혼자 온 박경림 씨의 남편 박정훈 씨, 유명 광고 기획자 채은석 씨, 패션 사진가 이건호 씨, 음악가 양진석 씨, 김진형 남영비비안 사장 등은 지 씨의 서울 청담동 집에서 기자와 함께 와인을 마시고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던 구면들이었다. 앳된 모델들도, 유명 정치인도 지 씨를 껴안고 응원을 했다.
스스로는 “낯을 가린다”고 하지만 지 씨는 사람을 깊게 공들여 챙긴다. 마음에 드는 식당과 미용실은 집처럼 자주 간다. 그러니 ‘지춘희 사단’이란 말도 생겼다. 빵떡모자가 트레이드마크인 ‘미스지 컬렉션’의 패턴 전문가 오대경 이사도 30년 가까이 그의 곁을 지켜왔다. 오래전부터 지 씨와 절친한 심은하 씨의 안부를 물었다. “그럼 잘 지내지. 가끔 봐. 이젠 시집가서 아줌마가 됐는데 뭘(기사로 쓰려고 그래).” 그의 옷을 입으려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찾아오지만 얼마나 진심이 통하느냐에 따라 절로 사람관계가 이어지거나 끊긴다고.
끝으로 10주년 서울패션위크 피날레의 소감을 물었다. “기사 쓸 때 10주년 기사라고 느낌이 달라? 그저 어느 기사건 마감하면 속이 후련한 거지.” 다른 설명이 필요 없었다. 1980년 ‘미스지 컬렉션’ 론칭 이후 그는 지금까지 그렇게 30년을 달려온 거다. 쇼가 끝난 후 그의 환한 표정을 보니 정말 후련해 보였다.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지춘희 씨는::
1976년 서울 명동에 ‘지 의상실’을 내고 1980년 ‘미스지 컬렉션’ 브랜드를 론칭했다. 연예계에서 스타일리스트가 전문화되지 않았던 1980년대 배우 나영희 강수연 최명길 등이 그를 찾아와 드레스를 맞췄다. 1990년대부터는 채시라, 고현정, 심은하, 이영애 등이 그의 마니아가 됐다. 최근에는 차예련과 이나영 등 연예인뿐 아니라 나경원 전여옥 의원 등 여성 정치인들도 그의 옷을 자주 입는다. 2001년 섬유의 날 국무총리 표창을 받았고 2007년에는 삼성 래미안 아파트 인테리어 디자인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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