惡의 塔에 갇혀 훔쳐야 사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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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6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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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쓰리’의 저자 나카무라 후미노리 씨(33). 그는 일본 도쿄 지하철을 오가는 소매치기가 뜻하지 않게 거대한 음모에 휘말리는 과정을 통해 현대사회의 불안과 공포를 다뤘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소설 ‘쓰리’의 저자 나카무라 후미노리 씨(33). 그는 일본 도쿄 지하철을 오가는 소매치기가 뜻하지 않게 거대한 음모에 휘말리는 과정을 통해 현대사회의 불안과 공포를 다뤘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쓰리/나카무라 후미노리 지음·양윤옥 옮김/247쪽·1만2000원·자음과모음

이쪽 방면으로는 확실히 소질을 타고난 듯한 젊은 소매치기꾼이 등장하는 이 소설은 얼핏 이외수 작가의 ‘황금비늘’과 겹쳐진다. 부자들의 돈만 노린다는 나름의 원칙, 귀신같은 솜씨로 지갑을 빼내고 현금만 챙긴 뒤 태연히 다시 지갑을 원래 자리에 되돌려놓는 기술, 가난하고 오갈 데 없는 아이에게 비법을 전수해주는 과정 등이 그렇다.

신출귀몰의 소매치기 현장 이야기로 시작되는 도입부는 호기심을 자극하며 시선을 끈다. 그러나 의협심도 있고 제법 인간적이기도 한 홍길동식 소매치기의 활약상 같은 게 펼쳐지리라고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다.

이야기는 시종일관 서스펜스적인 음울한 기조를 유지한다. ‘흙 속의 아이’ ‘모든 게 다 우울한 밤에’ 등에서 선악의 대립과 인간 내면의 폭력성, 삶과 죽음 등의 문제를 형상화해 왔던 작가는 소매치기라는 흥미로운 직업을 전면에 내세운 이 소설에서도 작가 특유의 문제의식을 심화시킨다.

일본 도쿄 지하철을 오가며 소매치기를 업으로 삼고 있는 니시무라는 사실 일종의 좀도둑에 가깝다. 그와 동료 이시카와는 ‘10억 엔 가진 놈에게서 10만 엔쯤 훔쳐봐야 거의 제로에 가깝다’는 신조로 자신들의 소매치기를 합리화하며 살아간다. 낡은 재킷이나 다 닳은 운동화를 신고 있다면 지갑이 바지 뒤춤에 삐죽이 나와 있어도 절대 훔치지 않는다.

하지만 어느 날 뜻하지 않게 그와 이시카와는 거대한 음모에 휘말려 들게 된다. 하루하루 출퇴근길 부자들의 지갑에서 현금을 빼내는 것으로 살아가는 한량들로서는 실체를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거대한 조직이다. 그 어두운 세계의 중심에 기자키라는 인물이 있다.

소설 속에서 기자키는 순수 악을 상징하는 존재로 보인다. 니시무라는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도, 거부할 수도 없게 된다. 기자키는 그에게 특정 인물의 소지품을 훔쳐오라는 몇 가지 지시를 내린다. 하지만 니시무라는 그 일이 어떤 맥락에서 이뤄지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니시무라는 감춰진 거대한 음모의 주변부에서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른 채 기자키의 지시에 따라 체스판의 말처럼 움직일 뿐이다. 그렇지 않았을 때 그를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이기 때문이다. 이미 이시카와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이 기자키에게 흔적도 없이 살해돼 세상에서 사라졌다.

어린 시절 니시무라가 처음 도둑질을 하게 됐을 때부터 끊임없이 허공에 나타났던 거대한 탑의 환영은 기자키와 그의 조직이 갖는 이미지와 흡사하다. 개인이 알 수 없는 어떤 압도적인 힘이 각자의 인생을 멋대로 조작하고 휘저어 버리는 데 대한 니시무라의 두려움과 공포감. 이것은 극도로 조직화된 동시에 파편화되어 버린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느끼는 막연한 불안과 흡사하다.

기자키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니시무라의 노력이 성공했을지 실패했을지에 대해 소설은 열린 결말을 유지한다. 어쩌면 성공과 실패는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성공했다 해도 세계가 비정하다는 사실을 조금도 바꿀 수 없을 가냘픈 몸짓이기에.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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