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거일이 쓰는 6·25의 결정적 전투]<1>38선을 사수한 춘천지구 전투

동아일보 입력 2010-04-01 03:00수정 2010-06-24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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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6.25∼27
소양강 사이두고 사흘 혈전… 北 ‘서울 포위작전’ 좌절시켜

6사단 천혜 지형 이용 적의 공세 꺾어
‘화염병’ 심일 소위, 北자주포 킬러 활약
한강 방어선 구축-미군 도착 시간 벌어

北‘한강북쪽 국군주력 섬멸’ 기도실패
김일성, 측근인 공격부대 군단장 강등
6월 25일 새벽 기습공격을 감행한 북한군은 춘천을 점령해 한국군을 포위하려 했으나 6사단의 저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사흘 동안 춘천을 지켜내 북한군의 향후 남침작전을 수정케 한 6사단. 멀리 소양강이 보인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모든 면에서 열세였던 한국군은 6·25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에 나온 사소하지만 치명적인 실수로 전력이 더욱 약해져 있었다. 다름 아니라 전쟁 전날 많은 장병이 부대 밖에 있었던 것이다.

1950년 6월 들어 북한군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감지되자 한국군은 내내 비상 상태를 유지했다. 장병들에게 외출과 외박을 금지시키고 부대 안에서 지내도록 했다. 그러다 마침 영내근무를 풀어준다며 육군본부에서 외출과 외박을 허용한 날이 6월 24일이었다. 이튿날 새벽 북한군이 침공을 시작했을 때 한국군의 전방부대들에선 많은 장병이 부대 밖에 있었다.

단 하나 예외 부대가 있었으니 춘천을 중심으로 한 중동부전선을 맡은 6사단이었다. 사단장 김종오 대령은 당시 상황의 심각성을 고려해 장병들에게 여전히 외출과 외박을 금지하고 있었다. 그 덕분에 6사단은 북한군이 침공했을 때 온전한 전력으로 대응할 수 있었다.

당시 전방의 한국군은 서쪽부터 옹진반도의 수도사단 17연대, 개성 방면의 1사단, 의정부 방면의 7사단, 춘천 방면의 6사단, 동해안 지구의 8사단 순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나머지 4개 사단 가운데 수도사단은 서울에 있었고 청주의 2사단, 대구의 3사단, 그리고 광주의 5사단은 공비들과 싸우면서 후방의 치안을 유지하고 있었다. 6사단은 예하 7연대를 왼쪽에 배치해 춘천지역을 지키고 2연대를 오른쪽에 배치해 인제와 홍천 사이 도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19연대는 예비부대로 사단본부가 있는 원주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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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역을 담당한 북한군은 2군단이었다. 남침 당시 북한군은 2개 군단을 편성했다. 김웅 중장이 지휘한 1군단은 1사단 3사단 4사단 6사단으로 이루어졌고 김광협 소장이 지휘한 2군단은 2사단 5사단 7사단으로 이루어졌다. 1군단은 전선의 서쪽을 맡았고 2군단은 전선의 동쪽을 맡았다.

2군단의 본래 작전계획은 예하 2사단을 춘천지역에 투입해 개전 당일에 춘천을 점령하고 7사단을 인제와 홍천 사이 도로로 진출시켜 한국군 6사단 주력의 퇴로를 차단하는 것이었다. 오대산에서 활동하던 유격대도 참가해 7사단을 돕도록 되어 있었다.

춘천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심일 소위의 흉상.
춘천을 점령하면 2군단은 한국군 포위작전에 투입될 예정이었다. 예하 7사단은 홍천을 거쳐 원주 방향으로 진출해 한국군을 동서로 차단하는 임무를 맡았다. 2사단은 가평을 거쳐 서울 동남방으로 진출해 한강 이북의 한국군을 포위하고 남쪽에서 투입될 한국군 증원부대들의 접근을 차단하는 임무를 맡았다. 만일 2사단이 서울 동남방의 저지 진지(blocking position)에 예정대로 도착하면 한국군은 북한군에게 포위되어 주력을 상실하리라는 것이 북한군의 계산이었다.

마침내 6월 25일 새벽 북한군 2사단은 한국군 6사단 정면을 기습했다. 왼쪽 춘천 정면의 7연대 지역을 침공한 북한군은 4연대와 6연대였다.

한국군은 북한군에 비해 전력에서 크게 열세였지만 다행히 지형이 방어에 유리했다. 높은 산줄기들이 가로로 달려서 적군의 접근을 어렵게 했고 북한강의 좁은 계곡은 포병 화력의 효과를 높였다. 특히 연대 대전차포중대의 소대장 심일 소위는 특공대를 조직해 북한강 계곡을 따라 남하한 북한군 자주포들을 수류탄과 화염병으로 파괴했다.

첫 전투에선 북한군 자주포의 위세에 눌려 전방 방어선에서 물러났던 터라 심 소위의 쾌거는 부대의 사기를 높였다. 당시 한국군 장병들은 자주포와 전차조차 제대로 구별하지 못했으므로 심 소위가 파괴한 자주포가 전차라고 믿었다. 어떻든 심리적 효과는 더욱 컸다. 7연대의 분전 덕분에 개전 당일에 춘천을 점령하려던 북한군의 계획은 처음부터 어긋나게 되었다.

전쟁 발발 이튿날인 26일 북한군은 예비대인 17연대까지 투입해 공격해 왔다. 한국군도 원주에서 북상한 19연대가 7연대의 방어전에 참여했다. 한국군은 평지에서 노출된 채로 공격해 온 북한군에게 포병 화력으로 큰 손실을 입히면서 주력을 점차 철수시켜 소양강 남안에 진지를 구축했다. 이날도 북한군은 큰 손실을 입고 소양강을 건너지 못했다.

사흘째인 6월 27일 작전 계획대로 춘천을 점령하지 못해 초조해진 북한군 2군단은 7사단의 2개 연대를 인제 방향에서 돌려 춘천 공격에 투입했다. 그러나 한국군은 지리적 이점을 효과적으로 이용해 포병 사격으로 손실을 강요했다. 이날도 북한군은 소양강을 건너지 못했다.

사단 동쪽 지역을 지킨 2연대도 잘 싸워서 북한군 7사단의 진출을 저지했다. 그러나 30여 대의 전차를 앞세운 적군에게 밀려 2연대는 6월 26일 오후 홍천과 인제의 중간 지점인 자은리(自隱里)의 방어선을 포기하고 큰말고개(大馬峴)에 새 방어선을 마련했다. 이때가 6사단의 최대 위기였다. 이 방어선이 무너지면 북한군에게 홍천을 내주게 되고 홍천을 잃으면 6사단의 퇴로가 막혀 북한군에게 포위될 터였다. 다행히 북한군 2군단 지도부는 부진한 춘천 방면의 전황을 타개하려고 7사단의 2개 연대를 춘천 방면으로 돌렸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전황이 극도로 나빠진 상황이었다. 서쪽에선 서울이 곧 적에게 함락될 상황이었고 동쪽에선 8사단이 물러나고 있었다. 전선이 그렇게 무너지자 육군본부 참모부장 김백일 대령은 “서부전선이 완전히 무너졌고 육군본부는 시흥으로 철수하므로 6사단은 사단장의 판단에 따라 철수하면서 중앙선을 중심으로 중부전선에서 지연전을 전개하라”는 작전명령을 유선으로 전달했다.

6월 28일 6사단은 질서 있게 철수작전을 수행해 적군에게 적지 않은 손실을 끼쳤고 6월 29일 마침내 홍천으로 물러났다.

6사단이 사흘 동안 춘천을 지킴으로써 북한군의 작전계획은 크게 틀어졌다. 2사단이 예정된 시일에 저지 진지인 서울 동남방에 도달하지 못함으로써 한국군 주력을 한강 북쪽에서 포위하여 섬멸하려던 기도가 실패로 돌아간 것이다. 6사단의 분투 덕분에 한국군은 패전한 부대들을 추슬러 한강선방어작전을 수행하면서 미군이 도착할 때까지 귀중한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북한군 지도부는 전투 실패에 대한 책임인사를 단행했다. 7월 10일 김광협 소장을 2군단장에서 2군단 참모장으로 강등시키고 김무정 소장을 2군단장에 앉혔다. 원래 김광협은 김일성이 신임하는 인물이었다.

1950년 1월 2사단장이었던 김광협은 김일성의 특사로 중국 베이징(北京)을 방문했다. 그는 그때까지 중국에 남아있던 조선족 병사들의 북한 귀환을 중국 군부에 요구했고 중국 군부는 그의 요구를 받아들여 그해 봄에 조선족 병사 1만4000명을 북한으로 보냈다. 2군단 예하 7사단은 바로 이들 조선족 병사로 편성되었다.

이처럼 공이 크고 신뢰하는 부하를 강등시키고 정적으로 여겨 좌천까지 시켰던 김무정을 기용해야 했을 만큼 춘천 점령의 실패는 북한군에게 아픈 실패였다. 2사단장과 7사단장도 교체되었다.

춘천지구 전투는 그리 크지 않은 싸움이었다. 그러나 싸움의 결과는 향후 전쟁의 흐름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만일 춘천이 일찍 북한군에게 함락되었다면 전쟁의 흐름은 크게 달라졌을 터이고 한반도의 역사도 크게 바뀌었을 것이다.

복거일 시사평론가·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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