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모던보이’ 백석, 토속의 맛에 빠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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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2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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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동치미국… 얼얼한 댕추가루…

음식을 존재 차원서 바라봐
문학의 새로운 경지 일궈내

◇백석의 맛/소래섭 지음/276쪽·1만3000원·프로네시스

메밀국수, 청배, 가재미, 수박씨와 호박씨, 무이징게국, 달재 생선, 떡국…. 이 토속적인 음식들은 모두 백석(1912∼1995)의 시에 등장한다. 백석의 시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도 그의 시에 이렇게 많은 음식이 등장한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확인된 백석 시 100여 편에 등장하는 음식의 종류는 110여 종.

백석이 그의 모던한 시 속에 토속적인 음식을 끝도 없이 늘어놓았다는 사실은 어딘지 낯설다. 영화 ‘모던보이’에서 배우 박해일이 백석을 모방한 헤어스타일을 연출했을 만큼 그는 당대의 유명한 모던보이였다. 그의 출중한 외모에 대해 당대 여성들뿐 아니라 남성들도 감탄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저자는 “시쳇말로 하면 백석은 당대의 ‘엄친아’ 혹은 ‘완소남’이었다”고 말한다. 이런 엘리트 시인이 왜 근대화된 도시나 식민지의 현실 대신 메밀국수에 생선조림 같은 서민적인 음식을 자꾸 언급했을까.

이 책에 따르면 이런 의문이 드는 이유는 우리가 시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음식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이다. 국문학자인 저자는 많은 사람들이 음식을 사소한 것, 배고픔의 대상물,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것으로만 간주하지만, 사실 음식은 그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고 강조한다. 백석은 “세상이 외면했던 맛있는 것들에 집착함으로써 누구도 도달하지 못했던 문학적 경지를 일궈냈다”는 것이다.

백석 시를 ‘음식’이란 주제를 통해 새롭게 읽어낸 이 책은 모던보이 백석의 음식사랑, 백석의 음식 시에 담긴 전통적인 사유, 음식 취향에 담긴 정체성 문제 등을 다룬다. 초창기 인류는 음식을 신의 선물로 생각했지만 그리스 로마 시대엔 철학자들이 정신적인 절대 진리를 추구함으로써 요리 기술이나 음식은 폄하됐다.

1980년대 중반 北에서 찍은 가족사진1980년대 중반 백석이 70대 중반일 무렵 촬영한 가족사진. 오른쪽 아래가 백석이며 옆이 부인 이윤희 씨. 뒤는 둘째 아들 중축 씨와 막내딸. 사진 제공 프로네시스
1980년대 중반 北에서 찍은 가족사진
1980년대 중반 백석이 70대 중반일 무렵 촬영한 가족사진. 오른쪽 아래가 백석이며 옆이 부인 이윤희 씨. 뒤는 둘째 아들 중축 씨와 막내딸. 사진 제공 프로네시스
근대 이후에는 영양주의가 지배적 관점이 되며 음식을 철저히 육체에 종속된 것으로 규정했다. 하지만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는 “자연과 문화의 관계는 ‘요리’를 통해서 나타난다”고 말했다. 동양문화에서 음식은 우주적인 법칙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백석의 시들은 이들의 관점에 맥이 닿아 있다. 백석의 시 ‘국수’의 한 대목은 이렇다.

“…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겨울밤 쩡하니 익은 동치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이 조용한 마을과 이 마을의 의젓한 사람들과 살뜰하니 친한 것은 무엇인가/이 그지없이 고담하고 소박한 것은 무엇인가.”

이 시에서 국수는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과 삶을 같이 하는 어떤 존재”다. 저자는 이를 “음식을 존재의 차원에서 제시함으로써 우리 고유의 전통을 되살리고자 했던 것”이라고 분석한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주인공이 마들렌 과자를 맛보다 유년시절의 경험을 떠올리는 것처럼, 미각이나 후각에 의한 기억은 그때의 상황과 관련된 모든 것을 떠오르게 하는 특징을 갖기도 한다. 인절미, 송기떡, 콩가루차떡의 냄새와 도야지비계, 무이징게국 등 음식을 통해 어린시절 향수를 그려낸 백석의 시 ‘여우난골족’ 역시 그를 잘 보여준다. 전문적인 문학비평이라기보다 백석 시를 매개로 ‘음식’에 관한 다양한 인문학적 성찰을 담아낸 책이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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