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연극을 눈앞에 두고 관객은 화면만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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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1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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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국제공연예술제 초청작인 러시아 연극 ‘모스크바, 사이코’의 공연 장면은 영상매체에 포위된 현대 연극의 위기 상황을 포착한다. 두 명의 카메라맨이 공연 내용을 근접 촬영한 영상이 자막 왼쪽 스크린에 교차 투사되고 있다. 사진 제공 서울국제공연예술제
서울국제공연예술제 초청작인 러시아 연극 ‘모스크바, 사이코’의 공연 장면은 영상매체에 포위된 현대 연극의 위기 상황을 포착한다. 두 명의 카메라맨이 공연 내용을 근접 촬영한 영상이 자막 왼쪽 스크린에 교차 투사되고 있다. 사진 제공 서울국제공연예술제

연극 ‘모스크바, 사이코’

디지털 영상에 익숙한 현대인의 현실외면 암시
그리스 비극을 러시아 현실로 불러내 연극 전개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대리보충(supplement)’이란 독특한 개념을 만들어냈다. 백과사전에 딸린 부록처럼, 결여를 보충하거나 대리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백과사전 자체를 불충분하게 만드는 역설적 현상을 지칭한다. 대리보충은 충만을 지향하지만 결국 결핍을 초래한다.

10월 시작해 3분의 2 지점을 돌파한 2009 서울국제공연예술제의 주제는 ‘아날로그와 디지로그’다. 공연이 지닌 아날로그적 속성에 방점을 찍되 디지털 기술로 이를 보완하겠다는 속내가 느껴진다. 9∼11일 공연된 러시아 실험극 ‘모스크바, 사이코’는 이런 시도가 초래할 ‘대리보충’의 역설을 극명히 나타냈다.

우크라이나 출신의 세계적 연극연출가 안드레이 졸다크가 연출한 이 작품은 아날로그적인 연극과 디지털적인 영상의 혼종(混種)을 꾀했다. 그리스 비극을 실존주의적 시각에서 극화한 프랑스 극작가 장 아누이(1910∼1987)의 ‘메데아’와 앨프리드 히치콕(1899∼1980)의 영화 ‘사이코’다. 그리스 신화 속 메데아는 황금 양모를 찾아 모험을 나선 이아손에게 반해 콜키스의 왕인 아비를 속이고 남동생을 죽이면서 이아손의 성공을 돕는다. 그러나 이아손이 그녀를 배신하고 코린토스의 왕 크레온의 딸 글라우케와 결혼하자 이아손과의 사이에서 낳은 두 아들을 죽이고 크레온과 글라우케도 독살한다.

연극은 이 그리스 비극을 현대 러시아로 불러들인다. 이아손은 불륜에 빠진 중산층 유부남, 메데아는 그런 남편에게 희생당하는 무력한 유부녀다. 크레온은 모스크바의 유력 정치인이자 재력가다.

이 지점에서 미국 중산층의 무의식적 불안을 그린 ‘사이코’가 틈입한다. 이아손이 메데아와 사랑을 나누다가 글라우케와 불륜을 나누는 장면에서 영화의 유명한 타이틀 시퀀스와 오프닝 장면이 겹쳐진다. 그렇게 아날로그 연극은 디지털 영상과 몸을 섞는다.

무대는 4개의 공간으로 나뉜다. 무대 왼쪽은 메데아의 공간이고 오른쪽은 글라우케의 공간이다. 왼쪽 위 공간은 메데아의 불안한 심리를 투사한 영화 ‘사이코’의 장면과 카메라맨 두 명이 핸드 헬드 카메라를 들고 공연 내용을 촬영한 흑백 영상이 교차 투사되는 대형 스크린이다. 오른쪽 위는 한글자막이 투사되는 스크린이다.

분열된 무대처럼, 시간이 흐를수록 공연도 영화 ‘사이코’의 주인공처럼 망아(忘我) 상태의 정신분열에 빠져든다. 극 중개에 개입해 배우들을 마이크 앞으로 불러내는 라디오 DJ와 끊임없이 연기 중인 배우들을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맨이 이를 조장한다. 처음에 영상은 연극적 이해를 돕기 위해 투입된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연극을 파괴하고 결국 미쳐버리게 만든다. 관객은 눈앞에 펼쳐지는 배우의 연기를 버리고 카메라 렌즈에 포착된 영상에 눈을 빼앗긴다. ‘아내의 복수’류 TV 통속극을 빼닮은 총천연색 현실보다 근접 촬영한 흑백 영상이 더 선정적이고 폭력적이기 때문이다. 무대 위 배우들도 관객의 눈이 아니라 카메라 렌즈를 더 의식한 동작을 펼친다.

연극이 총체적이라면 영상은 분할적이다. 영상이 연극을 보완하려는 순간 연극은 총체성을 상실하고 영상에 잡아먹히고 만다. 극중 메데아는 두 아들을 죽이지 않는다. 그 대신 연극이 죽어 나자빠진다. 바로 디지로그가 초래한 재앙이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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