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튀는 옷은 곤란해요” 한국형 영부인 패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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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1월 6일 03시 00분


대통령의 아내이자 대통령의 첫 번째 참모인 ‘영부인’은 참 아슬아슬한 자리다. 퍼스트레이디라는 무거운 이름과 개인적인 삶이 겹치는 이 자리는 이성적, 감성적으로도 지대한 힘과 의무를 갖는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영부인의 ‘패션’도 자유로울 수 없다. 영부인의 패션은 자신의 개성뿐 아니라 시대 상황을 반영하는 거울과 같다. 미국 버락 오바마 대통령 부인 미셸 오바마 여사의 패션은 ‘정치적 메시지’까지 담고 있다.

한국의 영부인은 모두 10명이다. 이들의 스타일에서 어떤 사회적 메시지를 읽을 수 있을까. 마침 역대 영부인이 입던 의상이 ‘한국패션 100주년 특별전’(롯데백화점 에비뉴엘 9층 아트갤러리)에서 8일까지 열리고 있다.

○전통적 내조 이미지만 강조…‘패션 소신’ 찾아보기 힘들어

신혜순 한국현대의상박물관 원장은 1999년부터 역대 영부인의 옷을 모으기 시작했다. 미국 유학 시절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의 역대 영부인 의상 전시를 보고 “한국에 돌아가면 같은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신 원장은 한국 디자이너 1세대인 최경자 씨의 딸이자 본인도 패션계에 몸담아 상류층 네트워크가 두꺼운 편이다. 하지만 영부인들의 옷을 기증받기란 쉽지 않다. 본인이나 가족에게 편지를 보내 취지를 설명하고, 답신을 받은 후 실제 옷을 기증받는 데는 1∼3년이 걸린다.

기억에 남는 영부인은 가장 빨리 옷을 보내 준 이희호 여사다. 편지를 보낸 지 일주일 만에 답신이 왔고, 한 달 후엔 고운 핑크색 한지함에 든 옷이 전달됐다. 신 원장은 “사회 활동을 많이 하셔서 그런지 의상 수집의 취지를 누구보다 빨리 이해했다”며 “기증한 의상을 입은 사진까지 보낸 것을 보자 눈물이 핑 돌 정도로 감동적이었다”고 말했다. 현직 대통령 부인 김윤옥 여사로부터는 “재임 기간이 끝나면 주겠다”는 답신을 받았다. 기증받은 옷은 모두 6벌이다.

전반적으로 우리나라 역대 영부인의 의상은 단정한 스타일의 전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웬만하면 ‘입을 타지 말자’는 주의를 반영하는 것일까. 모 여성 국회의원이 디자이너에게 “최대한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게 만들어 달라”고 주문했다는데 이 말이 영부인 스타일을 압축해 표현하는 듯하다. 패션을 사치, 로비, 구설수 등 부정적 이미지와 연결시키거나 전통적 내조형 여성의 이미지만 강조하는 것은 아닌지. 패션이 사치가 아닌 시대에 영부인이 패션을 통해 일정한 사회적 메시지를 던질 수 있을 정도의 소신을 보여줄 수는 없을까. 조금은 아쉽기도 하다.

○ 전형적 ‘내조’ 스타일 김윤옥 여사

현직 이명박 대통령 부인 김윤옥 여사(62)는 전형적인 내조형으로 평가된다. 수수하고 보수적 색상, 단정한 디자인…. 김 여사의 스타일에 대해 패션 업계는 “너무 수수해서 특징이 안 보이는 점이 특징”이라고도 평가한다. 눈에 띄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반영하기라도 하듯.

○ 과감한 컬러, 권양숙 여사

노무현 대통령(2003∼2008년 재임) 부인 권양숙 여사(62)는 2007년 군사분계선을 걸어서 넘어갈 때 입었던 의상을 기증했다. 짙은 진달래색이 강렬한 인상을 준다. 이 옷은 디자이너 김정숙 씨가 만들었는데 ‘북한에서 입을 옷’이라는 주문을 받고 북한에 흐드러지게 피는 진달래꽃을 본떴다. 권 여사는 해외 방문 시 해당 국가의 색상을 연구해 의상에 반영했는데, 이 정장 역시 그러한 경향을 드러낸다.

권 여사는 역대 영부인 중 가장 과감한 컬러의 의상을 시도했다. 평소 소박한 스타일을 추구하지만 빨강, 보라, 핑크색 투피스 등 기존 영부인들이 입지 않았던 경쾌하고 대담한 색상을 소화해 냈다.


○이희호 여사의 밝은 파스텔톤 의상

김대중 대통령(1998∼2003년 재임) 부인 이희호 여사(87)는 하이네크의 클래식한 정장을 기증했다. 1998년 청와대 마당에서 열린 공식행사 때 입었던 옷이다. 기증된 옷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여사는 밝은 컬러를 좋아해 파스텔톤 의상을 주로 입었다. 머리 모양도 시대적인 유행을 반영한 밝은 갈색톤으로 정리했다. 고령이었던 점을 보완하기에 적절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여사는 높은 학력에다 사회 활동도 활발해 다양한 공식행사에 참석할 일이 많아서 실용적인 스타일의 정장을 즐겨 착용했다.

이 정장의 또 다른 특징은 디자이너가 제작한 맞춤복이 아니라 기성복이라는 점이다. 김용희 한국현대의상박물관 실장은 “일반인들도 백화점에서 구입할 수 있는 기성복 제품이라는 점에서 이 여사의 소박함이 느껴진다”고 평했다.

○ ‘그림자형 내조’ 김옥숙, 손명순 여사

노태우 대통령(1988∼1993년 재임) 부인 김옥숙 여사와 김영삼 대통령(1993∼1998년 재임) 부인 손명순 여사는 대중적이지 않은 영부인들이다. 가급적이면 매스컴에 노출되지 않도록 ‘그림자형 내조’를 내세워 꼭 필요한 행사가 아니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김 여사는 ‘위대한 보통 사람의 시대’라는 슬로건 아래 권위주의 청산을 약속하며 출범한 정권 속에서 처신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손명순 여사 역시 전통적이면서 소극적 모습으로 대통령을 내조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우아하고 세련된 양장을 즐겨 입었다. 손 여사의 경우 정장 재킷에 발목까지 오는 긴 플레어 스커트 스타일을 즐겼다. 박물관 측은 김 여사와 손 여사에게 의상을 요청했지만 아직 받지는 못했다.

○ 이순자 여사는 ‘화려함’


전두환 대통령(1980∼1988년 재임) 부인 이순자 여사(70)의 스타일은 1980년대 컬러TV 시대의 도래와 함께 화려하고 스타일리시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이 여사는 1986년 벨기에 농아학교 방문 시 입었던 정장을 기증했는데, 여기에는 당시 유행하던 체크무늬와 유니섹스룩(여성성과 남성성이 공존) 요소가 고스란히 반영돼 있다. 남성복처럼 어깨를 강조한 유니섹스룩의 유행은 1987년 3월호 ‘월간 멋’ 겉표지에서도 볼 수 있다. 남성복 같은 정장에 넥타이를 매고 중절모를 쓴 여성 모델이 등장한다.

이 여사는 적극적이고 외향적인 성격으로, 패션에 관심이 많고 과감한 스타일도 시도했다. 패션업계는 이 여사를 “당시 유행 경향을 정확히 알고 이를 의상에 반영한 멋쟁이”라고 평가했다.

○ 잘 알려지지 않은 홍기 여사

최규하 대통령(1979∼1980년 재임)의 부인 홍기 여사(1916∼2004)는 역대 영부인 중 가장 짧은 남편의 재임기간에다 성격도 조용하고 스타일도 평범해 사람들의 기억에 거의 남아있지 않다. 평범한 외모, 단정하게 빗어 올린 머리, 수수한 디자인의 한복…. 프란체스카 여사, 공덕귀 여사와 더불어 서민적이고 평범한 이미지의 영부인으로 평가받는다. 박물관 역시 홍 여사의 기증복은 확보하지 못했다.

○ ‘우아함’의 전형, 육영수 여사


박정희 대통령(1963∼1979년 재임) 부인 육영수 여사(1925∼1974)로 부터 기증받은 물방울 무늬 플레어 스커트는 당시 육 여사의 젊은 나이(37)를 반영하기라도 하듯 상큼한 스타일이다. 허리를 잘록 묶고 치맛단을 넓게 펼친 플레어스커트는 1950, 60년대 크게 유행했다. 큼직한 물방울 무늬가 시원해 보인다.

육 여사는 대통령을 조용히 내조했던 프란체스카 여사나 공덕귀 여사와 달리 다양한 사회활동을 하면서 새로운 정치인 배우자상을 부각시켰다. 스타일에 있어서도 한복을 고수한 전 영부인들과 달리 단아한 스타일의 양장도 즐겨 입었다.

1960년대는 생활이 안정되면서 패션에 눈 뜨는 사람이 늘어나던 시기다. 소매 없는 ‘슬리브리스’ 드레스나 길이가 짧은 핫팬츠, 미니스커트도 등장했다. 이런 상황도 육 여사의 의상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짐작된다.

육 여사는 우아하고 차분한 몸가짐으로 긍정적 평가를 받고 있는데, 신혜순 원장도 그에 대한 기억이 있다. 신 원장이 어머니 최경자 씨와 함께 육 여사의 옷을 지으러 청와대에 갔을 때다. 신체 치수를 재는 동안 어린 지만 씨가 장난감을 가지고 발치에서 왔다 갔다 하자 육 여사는 차분한 목소리로 ‘가서 놀아라, 여기 손님들 와 계시잖아’라고 여러 번 타일렀다. 신 원장은 “어린아이가 말을 안 들어 웬만하면 짜증 낼 법도 한 상황이었는데 육 여사 목소리는 한 번도 커지지 않더라”고 회상했다.

○ 내조에 묻힌 ‘신여성’ 공덕귀 여사

윤보선 대통령(1960∼1962년 재임)의 부인 공덕귀 여사(1911∼1997)의 가족은 베이지색 바탕에 갈색 줄무늬가 있는 리넨 여름 정장을 기증했다. 리넨은 다루기 아주 까다로운 소재다. 구김이 잘 가기 때문이다. 리넨 정장에서 공 여사가 상당한 멋쟁이였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공 여사는 늘씬하고 깨끗한 인상이어서 양장이 잘 어울린 것으로 전해진다. 공 여사는 또 부산 일신여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서 신학을 공부한 신여성이기도 하다.

하지만 1년 7개월 청와대에서 지내는 동안 외부 활동을 전혀 하지 않았다. 옷도 소박한 한복을 주로 입고 머리 모양도 전형적인 낭자머리를 고수했다. 낭자머리는 가운데 가르마를 타고 뒤에 쪽을 찐, 전형적인 조선 여인네 머리다. 여성운동을 했고 기독교 여성지도자 역할을 할 정도로 활달했던 그가 영부인 시절만큼은 너무 조용하게 지낸 것이 아닌지.

○ 기운 옷 또 기워 입은 프란체스카 여사

이승만 대통령(1948∼1960년 재임)의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1900∼1992)의 며느리는 모직 회색 정장을 기증했다. 교복만큼이나 절제되고 단정한 스타일이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한복을 즐겨 입었지만, 양장도 자주 입었다.

옷을 유심히 살피다 보면 목덜미 부분에 여러 번 꿰맨 흔적이 있다. 쉽게 닳지 말라고 천을 몇 번 덧대 입은 것이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이 옷을 36년간 입었다. 며느리 조혜자 씨는 시어머니를 ‘근검절약이 몸에 밴 사람’으로 기억한다. 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1950년대라도 권력 핵심층은 부족한 것 없이 지낼 수 있었겠지만 프란체스카 여사는 검소한 생활을 고집했다. 스타킹을 신다가 구멍이 나면 버리지 않고 뭉쳐 구두 속에 넣어놓았다. 구두 모양이 상하지 않도록 보관하기 위해서다.

옷 안감에 무궁화 무늬를 새겨 넣은 점도 특이하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해 옷 안감에 무궁화 무늬를 새겨 넣게 했다는데 이 옷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글=김현지 기자 nuk@donga.com
디자인=공성태 기자 coon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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