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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9년 9월 5일 02시 5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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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는 죄와 구원 모두가 먹는다는 행위와 관련된 특이한 종교이다. 서양미술에서 식사가 중요한 주제였던 것은 이 때문이다.”
저자는 동양미술과는 달리 서양미술에서 식사와 음식을 소재로 한 그림이 빈번하게 등장한다는 점에 주목해 서양미술과 음식의 관계를 소개했다.
15세기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그리스도가 빵과 포도주를 나누며 인류구원을 선포하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중세 서양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구원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일상의 음식은 음욕(淫慾)의 죄와 연결됐고 따라서 최대한 검소한 식사나 단식이 미덕이었다.
16세기 프랑스 플랑드르 출신의 화가 요아킴 보이클레어의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에 있는 그리스도’에는 과일과 채소 등 다양한 먹을거리가 묘사돼 있다. 사실적인 묘사에 시선을 빼앗기다 문득 그림 위쪽을 보면 그때서야 예수와 그 발치에 앉아 있는 마르타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앞쪽의 정물은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아 성경 속 장면으로 이끄는 동시에 세속의 것에 쉽게 미혹되는 인간의 습성을 비판하고 있다.
이후 이런 양식의 회화보다 음식과 식사 자체를 묘사하는 그림이 늘어난다. 플랑드르에서 활동한 피터르 브뤼헐의 ‘게으름뱅이의 천국’(1567년)이 그 예다. 배가 불러 널브러져 있는 세 남자와 허리에 나이프를 꽂은 채 달려오는 돼지, 두 다리로 걷는 삶은 달걀, 강처럼 흐르는 우유 등이 표현돼 있다. 표면상으로는 이런 타락한 모습을 경계하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풍요로운 먹을거리에 대한 동경이 담겨 있다.
20세기의 앤디 워홀은 캠벨수프 시리즈를 통해 서양미술이 음식을 그려온 방식을 뒤집었다. 통조림 수프는 비싼 음식도 아니고 구하기도 쉽다. 과일과 고기처럼 비싼 재료, 혹은 빵처럼 종교적 의미를 지닌 음식만이 정물화의 소재가 됐던 서양미술의 관습을 깨뜨린 것이다. 워홀은 세균에 감염된 참치캔을 먹고 두 명의 주부가 사망한 사건을 소재로 한 ‘참치통조림의 비극’에서 음식에 얽힌 죽음의 공포를 탐구하기도 했다.
음식 그림은 서양미술에서 본능적인 식욕과 이를 억제하는 도덕률, 그리고 사람을 구원하는 음식의 숭고한 의미가 충돌하는 장이었다. 저자는 “사람과 사람, 사회와 개인, 문명과 자연, 신과 인간, 죄와 구원, 삶과 죽음, 이 모두를 결합시키는 행위가 식사였다”며 “그런 의미에서 식사와 미술, 그리고 종교는 밀접했다”고 말한다.
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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