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169>

  • 입력 2009년 8월 30일 16시 53분


제9부 나의 키스는 닻을 내리고

제35장 로봇과 뇌

169회

노민선에 대한 조사는 보안청 특수대에서 사흘 동안 면밀하게 진행되었다. 글라슈트의 난동과 최 볼테르 교수의 죽음이 보도되자, '배틀원'을 폐지하라는 자연인 그룹의 주장이 새삼 주목받았다. 운영위원회를 대표하여 <보노보> 사장 찰스는 '배틀원 2050'에서부터 격투 로봇에 대한 점검과 보안을 더욱 강화하겠다는 수습책을 내놓았다.

우승 축하연에 참석한 이들 중 상당수가 참고인 조사를 받았다. 특히 2층 전시장에 함께 있었던 석범의 진술을 들은 뒤, 보안청은 민선의 행동을 '정당방위'로 결정하고 석방했다.

민선은 보안청 건물을 나오자마자 곧바로 SAIST 차세대로봇연구센터에 마련된 최 볼테르의 빈소로 향했다. 첫날 붐볐던 빈소는 둘째 날부턴 한산했다. 간혹 자연인 그룹을 지지하는 학생들이 구호를 외쳤지만 연구소 측의 대응이 없자 곧 잠잠해졌다. 오직 글라슈트에게만 집중한 볼테르였기에, 마음을 나눈 동료 교수도 가르침을 얻은 학생도 없었다.

서사라 트레이너는 돌아오지 않았다. 쓸쓸한 빈소는 뚱보 보르헤스와 꺽다리 세렝게티가 번갈아 지켰다. 글라슈트를 정비하고 다양한 동작을 실험한 훈련장 정면에 볼테르의 영정 사진이 놓였다. 볼테르가 글라슈트의 가슴을 열고 심각하게 안을 들여다보는 사진이었다. 죽어서도 글라슈트와 함께였다.

민선은 영정 앞에 엎드려 한참을 울었다. 보안청에서 사흘 내내 침착하게 묵비권을 행사하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산발한 머리카락이 바닥을 쓸었고 더운 눈물이 얼굴을 온통 얼룩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끝내 실신하였다.

석범과 민선이 단 둘만 남게 된 곳은 훈련장 옆 정비실이었다. 사라의 기계몸이 이상을 일으켰을 때 볼테르가 응급 수술을 한 바로 그 곳이다. 수술대에 누운 민선을 진료한 의사는 절대 안정이 필요하다는 말만 남기고 정비실을 나갔다.

"……민선!"

석범은 수술대 곁에 의자를 놓고 앉아서 민선의 뭉치고 꼬인 머리카락을 손가락을 넣어 쓸며 정리했다. '정당방위'라는 면죄부를 받기는 했지만 그녀는 사람을 죽였다. 글라슈트를 제지하여 석범과 볼테르를 구하기 위해서였다고 해도, 살인은 살인이었다.

더군다나 그녀가 쏜 총에 사망한 이는 최 볼테르다. 볼테르가 누구인가. 고약한 성격 탓에 민선과 사사건건 부딪혔지만 '배틀원 2049' 우승로봇 글라슈트의 팀장이다. 민선의 꿈을 이루기 위한 대장정에서 정점에 섰던, 그리하여 그녀가 마음으로 늘 의지하며 연구에 매진했던 지지자요 후원자요 리더였다.

"으응…… 응!"

민선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며 올라갔다. 석범이 미소와 함께 그녀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짚었다.

"바보같이…… 쓰러지기나 하고."

민선이 주위를 곁눈질했다. 훈련장 옆 정비실이란 걸 알아차리고 상황을 짐작했다.

"SAIST까지 따라 온 거예요? 남 형사와 서 트레이너는?"

"아직!"

석범은 말을 아꼈다. 비관적인 상황을 전하여 민선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글라슈트는?"

"보안청 특수대에서 조사가 끝났어. 곧 차세대로봇센터로 넘겨질 예정이야."

석범은 거기서 말을 끊고 민선과 눈을 맞추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하기 힘든 말을 지금부터 던져야 하는 것이다. 민선은 손을 뻗어 석범의 손을 쥐고 웃어보였다. 따듯했다.

"알고 있었어?"

석범이 툭 질문을 던졌다. 민선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리고 체념한 듯 긴 한숨을 내쉰 뒤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알고 있었다고?"

석범이 다시 물었다.

"최 교수님만을 탓할 수는 없어요. 서울 대회가 끝나자마자 '배틀원 2050'을 다시 준비해야 하니까요. 최 교수님으로선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여 무사시에게 베팅을 하셨겠지요. 저도 서 트레이너가 귀띔을 해줘서 알았어요. 일종의 보호 장치죠. 우리가 이기면 돈을 잃어도 그만이고, 우리가 만약 지면 베팅한 상금을 받아 연구를 다시 시작하겠다는……."

석범이 고함을 질렀다.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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