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국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조선인을 살해한 조선인

  • 입력 2009년 8월 29일 02시 59분


◇ 자객 고영근의 명성황후 복수기/이종각 지음/424쪽·1만5000원·동아일보사

1903년 11월 24일 오후 7시경 일본 히로시마 현 구레 시의 한 가옥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피해자는 목과 턱 주위를 수차례 칼에 찔렸고 머리는 쇠망치에 난타 당했다. 살해 뒤 곧바로 인근 파출소로 가 자수를 하는 범인의 품에는 편지가 들어 있었다. 조선의 대신들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자신의 살인 동기가 이렇게 적혀 있었다. “국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였다.”

범인이 말한 국모가 바로 명성황후다. 피해자 우범선과 가해자 고영근은 모두 조선인으로 둘 다 일본에 망명한 처지였다.

저자는 가해자의 나라 일본에서 벌어진 조선인 사이의 살인사건을 추적해 명성황후의 시해 사건을 논픽션으로 재구성했다. 저자는 일본 외교문서와 당시 일본 신문 보도 등의 자료를 발굴해 단편적으로 알려져 있던 고영근의 우범선 살해사건의 진상과 배경, 재판과정 등을 쫓았다.

우범선은 1895년 10월 8일 주한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의 지휘하에 일본 측이 명성황후를 시해(을미사변)할 때 조선훈련대 제2대대장을 맡고 있었다. 그는 일본 낭인 등의 경복궁에 난입 때 병력을 이끌고 동참했다. 명성황후의 시체를 소각, 매립할 때 그가 지시했다는 기록과 그가 “왕비를 죽인 것은 자신이라는 취지의 말을 했다”는 일본 외교문서도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우범선은 사건 후 일본으로 망명해 일본 여자와 결혼했다. 그의 장남이 농학자 우장춘이다.

고영근은 민씨 집안의 심부름꾼 출신으로 명성황후의 총애를 받았던 인물이다. 만민공동회 회장을 지내기도 한 그는 폭탄테러 사건으로 수배를 받자 1899년 일본으로 망명해 생활하고 있었다.

고영근이 사건을 일으킨 직후 고종은 주한 일본공사를 불러 고영근에 대한 선처를 부탁한다. 고영근은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된다. 고종은 또 1904년 3월 방한한 이토 히로부미에게 직접 고영근의 국내 송환을 부탁하는 비밀 외교 교섭을 벌인다. 그 결과 고영근은 5년간의 일본 복역을 마치고 1909년 한국으로 돌아온다. 고영근은 이후 고종과 명성황후가 합장된 홍릉의 능참봉이 된다.

저자는 우범선이 남긴 자술서와 우범선의 아내가 사건 발생 후에 한 신문 인터뷰까지 발굴해 급박했던 명성황후 시해사건 모의과정부터 고영근의 능참봉 시절까지를 흥미진진하게 엮였다.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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