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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9년 7월 4일 02시 5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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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2세기 독일어였던 고대 작센어의 ‘bilidi(빌리디)’는 ‘마법의 표식, 원형, 진정한 의미’라는 뜻이다. 여기에서 유래한 독일어 ‘Bild(빌트)’는 ‘형상’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독일의 화가이자 음악가인 저자는 이런 점에서 ‘형상’은 인간이 글로 나타낼 수 없는 것을 드러낸 무의식의 언어라고 말한다.
저자는 선사시대 동굴벽화부터 고대 이집트의 파피루스 그림, 중국의 서예 작품, 이슬람의 장식 미술, 서양의 기독교 세밀화, 르네상스 회화, 현대의 추상미술에 이르기까지 동서고금의 형상이 당대의 인간 의식을 어떻게 드러냈는지 살핀다.
차라리 물감을 손바닥에 발라 벽에 누르는 게 편했을 텐데, 구석기인은 왜 굳이 손바닥 주변을 채색해 손의 형상을 드러냈을까. 저자는 구석기인이 벽에 손을 댄 뒤 입으로 물감을 뿌렸을 것이며 이는 벽에 인간 존재의 생기를 불어넣는 작업이었다고 말한다.
저자는 또 기원전 2500년 고대 이집트 파피루스에 그려진 한 부부의 뱃놀이 풍경을 통해 이집트인들이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탐구한다.
한가로운 뱃놀이 장면처럼 보이지만 저자는 이를 죽음의 신인 오시리스의 신전에 가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당시 죽음은 피해야 할 두려운 대상이 아니라 행복하고 영원한 삶을 뜻했다.
파피루스 화면 아래쪽에는 부부의 작은 배를 끌고 갔던 범선이 홀로 반대 방향으로 돌아가는 그림을 그렸다. 이에 대해 저자는 영생을 추구했던 이들 부부의 꿈이 완성된 것이라고 해석한다.
저자는 한자의 서예에도 관심을 보인다. 저자는 “예를 들면 편안할 ‘안(安)’자는 안전한 집 안에 있는 여인의 형상에서 비롯됐다”며 “서예가 그림은 아니지만 인간 내면의 형상이 함께 떠오르는 한자는 서양인은 상상할 수 없는 풍부함을 지녔다”고 평가했다.
책의 주제는 학술적이지만 저자는 서정적이면서도 격정적인 문체, 풍부한 사례로 형상의 역사를 흥미롭게 추적했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