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박물관 100년의 사람들]<3>김리나 교수가 말하는 아버지 故김재원 초대 국립박물관장

  • 입력 2009년 3월 26일 02시 58분


김리나 교수
김리나 교수
“美외교관 제보로 1·4후퇴前 유물 피란”

“25년의 오랜 세월을 박물관에서 살았고 나의 세계는 모두 박물관 창문을 통해 보고 경험한 세계였다. 그것은 결코 화려하지도 않았으며 영달이 약속된 길도 아니었다.”

1945∼1970년 국립박물관의 수장으로 초기 한국 박물관의 기틀을 다진 김재원 초대 국립박물관장(1909∼1990)이 자서전 ‘박물관과 한평생’에서 남긴 말이다.

최선주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팀장이 김 전 관장의 딸 김리나 홍익대 명예교수(67)를 만났다. 한국 미술사의 원로인 김 교수는 아버지의 자서전을 펴낸 바 있다.

최선주=광복 직후 한국은 박물관이 어떤 곳인지조차 잘 모르는 시절이었죠. 김 전 관장님의 삶은 초기 한국 박물관의 역사나 다름없습니다.

김리나=아버지는 일제강점기 독일 등에서 10년간 유학하며 박물관의 중요성을 깨달았습니다. 외국어에 능통해 미군정과의 의사소통이 자유로웠죠. 한국인이 주도한 첫 고고학 조사인 1946년 경주 호우총 발굴도 미군정과 교섭해 허락을 받아냈습니다. 성품이 강직해 미 군정청이 경복궁에 야전 건물을 짓는다며 당시 경복궁 안에 있었던 국립박물관 앞뜰을 파헤치자 언론에 알려 사회 이슈로 부각시켰다가 미군정의 조사를 받기도 했어요.

미군들이 경복궁 안의 민속 유물을 기념품이라며 몰래 가져가던 시절이었다. 김 전 관장은 이를 막기 위해 관장 직을 맡자마자 경복궁 경안당 관사로 이사했다. 관장이 된 뒤 지방에 있던 금동반가사유상, 금관 등 유물을 서울로 옮겼다. 개성부립박물관을 편입해 서울 본관, 경주, 부여, 공주, 개성 분관 체제가 갖춰졌다.

6·25전쟁 때 박물관은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았다. 1950년 9월 28일 서울 수복 이전 공산당원들이 유물을 북한으로 가져가려 한 것. 박물관 직원들은 지연작전을 폈다. 3일 동안 포장한 유물이 불과 9점. 포장 뒤엔 유물 기록을 빠뜨렸다며 포장을 풀었다. 국군이 서울에 다다르자 북한군이 후퇴했고, 유물을 납북 직전에 겨우 구할 수 있었다.

최=이후 유물이 어떻게 부산으로 내려왔습니까.

김=1950년 12월 부산 미국 공보원장인 유진 크네즈 씨가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넜다는 정보를 몰래 알려줬습니다. 아버지는 유학 중 전쟁으로 문화유산이 파괴되는 것을 봤기 때문에 유물의 위험을 직감했습니다. 정식 공문을 받지 않고 문교부 장관 개인의 영문 문서로 허락받았어요. 정부의 유물 피신 사실이 알려지면 시민의 동요를 막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1951년 1·4후퇴 한 달 전 유물을 미군 트럭에 싣고 부산에 도착했습니다.

전쟁이 끝나도 박물관의 시련은 계속됐다. 박물관 건물 자리가 없었다. 누군가 학교에 국립박물관을 마련하라고 했다니 박물관을 대하는 인식 수준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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