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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9년 2월 17일 02시 5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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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말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장에서 물러난 임형택(66) 한문교육과 교수는 자신을 “한국문학, 그중에서도 한국한문학 연구자”라고 말했다.
하지만 40여 년 연구 인생에서 그의 관심은 한문학에 그치지 않았다.
역사학과 철학을 넘나들었다.
“한문학 작품 하나를 제대로 분석하려면 그것이 창작되고 읽힌 시대를 이해해야 한다”는 신념 때문이다.》
정년퇴임(20일)을 앞둔 임 교수는 14일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장실에서 만났을 때도 “문사철(文史哲)은 따로 공부하는 학문이 아니다”고 말했다.
임 교수는 올해 3·1운동 90주년을 맞아 동아시아학술원이 13, 14일 연 국제학술회의에서도 국내외 시각을 통합해 담은 주제 ‘1919년 동아시아, 한국의 3·1운동과 중국의 5·4운동’으로 기조 발제를 했다. 그는 1973년 ‘신문학 운동과 민족현실의 발견’이라는 논문을 통해 3·1운동이 1920년대 근대문학운동에 미친 영향도 천착했다.
○ 역사-철학 넘나들며 ‘현실 속의 문학’ 분석
‘흥부전’을 통해 조선 후기 사회변동의 역동성을 읽어낸 ‘흥부전의 현실성에 관한 연구’(1969년)나 구한말의 민족 현실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근대 한문학에 주목한 ‘매천 황현의 시 세계와 시 연구’(1970년)처럼 임 교수의 학문 궤적은 사회 현실과 맞닿아 있었다.
“학문은 사회적 실천을 통해 현실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학문 자체의 순수성과 전문성을 존중해야 하지만 시대와 동떨어지면 아무 의미 없어요.”
이런 생각은 실사구시 학문을 대표하는 다산 정약용에 대한 연구로 이어진다. 임 교수는 1976∼1987년 10여 년간 목민심서의 역주와 완역 작업을 했고 다산의 학문이 제자들을 통해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연구했다.
임 교수가 대학에 입학한 1960년대는 한문학이 한국문학에서 소외돼 있었다. 한문학은 한글로 쓰이지 않아 국문학의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임 교수는 달랐다. “한글문학이 본격적으로 나오기 이전 선조의 희로애락이 함축된 한문학 자료가 사장되고 있는 걸 보고만 있을 수 없었지요.”
당시 한문학을 공부할 수 있는 곳이 거의 없어 재야 한학자를 찾았고 대학에서 중국문학 강의를 들으며 문학 이론을 공부했다. 이후 1970년대 한국고전문학연구회와 한국한문학연구회, 1990년대 민족문학사연구소 설립을 이끌었다.
그가 발굴하고 분석한 자료들은 한문학 연구의 기초가 됐다. 한문 단편 소설을 발굴해 소개한 ‘이조한문단편집’(1973년)으로 학계에 야담(野談) 문학의 존재를 알렸다. 이를 계기로 소설가들이 야담을 역사 소설에 활용하기 시작했다.
한문 서사시의 실체를 발굴한 ‘이조시대서사시’(1994년), 새 가사문학을 여럿 찾아낸 ‘옛 노래 옛 사람들의 내면풍경’(2005년), 수록된 고전의 절반이 새로 발굴된 작품인 ‘우리 고전을 찾아서’(2007년) 등의 저작으로 한국문학사는 더욱 풍성해졌다.
○ “한문학 연구, 흥미 위주 자료 발굴에 머물러선 안돼”
임 교수는 “한문학 연구가 충분하지 않은 현실에서 자료 발굴 자체도 의미가 있지만 ‘이런 자료가 있다’고 소개만 하는 흥미 본위의 자료학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임 교수는 우리 학계에 대해 “지식을 얻으려면 소통해야 하고 소통해야 지식이 원대하게 확장될 수 있는데 우리는 학문과 시대, 사람, 학문 사이의 삼통(三通)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삼통의 부족은 인문정신의 핵심인 비평정신의 실종으로 이어졌다.
“문단은 비평 기능이 있어 좋은 작품과 수준 미달의 작품을 구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인문학은 논문이 쏟아져도 학자들이 서로 논문을 보지 않기 때문에 제대로 된 평가가 없습니다. 대학은 논문 수로 학문을 평가하는 업적주의만 내세우고 있어요. 학문이 공정한 평가와 공론의 장이 되지 않는 이상 학문의 위기라는 말은 되풀이될 겁니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