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격인터뷰]박춘록 “공부 잘하는 딸 못본척…엄마 마음은 어땠을지”

  • 입력 2008년 12월 23일 11시 01분


고졸 40대 주부 ‘퀴즈 영웅’ 등극 -충북 청주 박춘록 씨. KBS 자료화면
고졸 40대 주부 ‘퀴즈 영웅’ 등극 -충북 청주 박춘록 씨. KBS 자료화면
충남 부여군에서 태어난 한 소녀가 있었다. 성적은 늘 상위권 이었지만 가난했던 탓에 수업료를 제 때 못내 교실 뒤에서 벌서는 일이 다반사였다. 아픈 아버지를 대신해 어머니가 대신 식당일, 막일을 하며 번 돈으로는 대학은커녕 3남매의 입에 풀칠조차 어려웠던 생활.

고된 삶에 지친 어머니는 딸의 성적표를 봐도 잘 칭찬을 해주지 않았다. 소녀도 공부에 대한 욕심을 버렸다. 공부를 잘하면 대학가고 싶을 테니까. 미장일을 하던 어머니가 팔을 다친 어느 날, 소녀는 한 방적회사가 운영하는 산업체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3교대 고된 공장 일을 하면서도 배움에 대한 갈증은 가시지 않았다. 그녀가 바로 최근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주부 퀴즈 왕’ 박춘록(40) 주부다. 22일 충북 청주시를 찾아 박 씨를 만났다.

지금은 초등학생과 중학생 두 아이의 엄마인 전업주부 박춘록 씨는 지난해부터 4번 퀴즈대회에 우승했다. 박 씨는 지난해 1월 15일 KBS1 TV에서 방송된 ‘우리말 겨루기’에서 ‘우리말 달인’에 등극한 데 이어 올 2월에는 ‘우주인 서포터스 선발퀴즈쇼’에서 우승했고, 21일 KBS1의 ‘퀴즈 대한민국’에서도 ‘퀴즈영웅’ 타이틀을 차지해 4900만 원의 상금을 손에 쥐게 됐다.

“우승이 확정되고 나서 엄마가 정말 좋아하셨어요. 제가 학교를 많이 못 다닌 것이 한이 되셨나 봐요. 그런 한을 조금씩 씻으시는 것 같더라고요. 딸이 대학은 안 갔어도 최고라는 소리를 듣고 사는 구나 생각 하신 거죠.”

박 씨는 산업체 고등학교에 들어갈 때도 혼자 결정했다. 스스로 돈을 벌어서 대학을 가자는 생각에 가게 됐다고. 나중에 지원 사실을 알게 된 어머니는 반대를 많이 했지만 딸의 뜻을 꺾을 수는 없었다. 그 일로 어머니는 두고두고 가슴 아파하셨다고. 공부 잘하는 딸을 제대로 교육 시키지 못한 게 어머니의 한이 된 것은 박 씨도 나중에서야 알게 됐다고 한다. 이 대목을 회상하며 박 씨는 잠시 목이 메기도 했다.

“엄마는 제가 자격증을 딸 때마다 기뻐해 주셨어요. 학교를 졸업하고 건설회사에서 일하다가 돈을 많이 번다는 말에 고압가스화학기능사, 롤러 운전기능사, 굴착기 운전기능사 자격증을 땄거든요. 엄마는 제가 도전할 때마다 ‘공부한다는 걸 가르칠 걸’ 이란 말씀을 자주 하셨어요.”

박 씨는 건설회사에서 5년 가까이 굴착기 롤러 운전기사로 일했다. 지금의 남편을 만난 곳도 건설회사였다. 신갈·안산 간 고속도로의 반월터널, 논산·계룡대 사이 도로는 모두 박 씨의 땀이 어린 곳이다.

“당시 여자들이 토목 공사를 하는 일은 흔치 않았어요. 제가 남자 형제가 둘 있고 원래 선머슴 같았거든요. 어쩌다 여탕에 가면 아주머님들이 깜짝 놀라시면서 “어머, 여기 여탕이야!”하고, 여자인 척하고 머리 좀 내 놓고 있으면 지나가던 기사님들이 보시느라고 거리 전체가 마비되는 일도 있었어요.”

결혼할 때 남편은 ‘대학에 보내주겠다’는 약속을 했지만 ‘허니문 베이비’가 생기자 박 씨는 건설일도 그만두게 됐다. 더구나 큰 아이가 선천성 장 질환을 앓아 세돌 때까지 병원을 들락날락하면서 공부의 꿈은 더욱 멀어졌다. 지금은 건강한 중학생이 돼 있지만 당시만 해도 세상의 모든 불행이 자신에게만 오는 것만 같았다고.

“큰 아이는 건강하게 커서 학교를 다니는 것만으로도 고마워요. 제가 애들은 어려서는 놀아야 한다는 생각에 공부나 성적에는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고 있어요. 그래도 아이들은 처지지 않을 정도로는 공부를 합니다.”


그렇게 전업주부로서의 생활을 하던 중 TV퀴즈대회에서 청주에서 지역 예심을 한다는 자막을 보게 됐다. 막상 출연이 성사되고 우승하게 되니 엄청난 자신감이 생기더라고.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다른 퀴즈 프로그램에도 도전하게 됐다. 처음에는 탐탁치 않게 여겼던 남편도 우승을 하고 오니까 예상 문제도 뽑아주고 관심을 가져준다고. 평소 닥치는 대로 읽던 신문, 소설, 잡지도 큰 도움이 됐다.

“퀴즈가 제게 준 것은 바로 ‘뭐든지 할 수 있다’는 마음이죠. 상금에 욕심이 있어 출연하는 것도 중독성 때문에 출연하는 것도 아니죠. 어쩌면 이 문제는 나만 알 것 같은 은밀한 즐거움이 생겨요. 저는 예전에도 당당했지만, 퀴즈를 하면서 더 자신감이 생긴 것 같아요.”

이런 박 씨가 새롭게 꾸는 꿈은 바로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는 것이다. 아이들의 행복한 꿈을 키워줄 수 있는 초등학교 선생님이 지금 박 씨의 꿈이다. 2007년 1월 ‘우리말 겨루기’ 우승 이후 남편이 대학을 알아보면서 모 대학 입학처장과 면담 시간까지 잡아주었지만, 정말 하고 싶었던 선생님의 꿈과는 거리가 먼 학과여서 접고 말았다고 한다. 그러다 최근 박 씨의 외숙모도 수업료를 대 줄 테니 교대를 다녀 보라고 권했다고 한다. 하지만 두 아이 뒷바라지도 해야 하고 어렵게 사업하는 남편 에게 큰 짐을 지울 수 없어 고민 중이라고. 또한 영어 공부의 벽도 크다고 말했다. 박 씨는 일단 내년에는 한자 공부를 해서 1급을 딸 계획이라고 밝혔다.

박 씨에게 어려운 환경에 있는 어린 친구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을 해달라고 했다.

“퀴즈대회 참가 전 집안 컴퓨터 책상 옆 화이트보드에 ‘퀴즈영웅 박춘록’이라고 써 놨어요. 거울을 보면서도 저는 ‘나는 할 수 있어’라고 말해요. 그렇게 마음 먹으면 정말 이루어지거든요. 아이들에게 ‘네가 원하는 꿈을 확실히 품고 노력을 하면 당장은 어렵겠지만 이뤄진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 그것이 중요해요.”

글=최현정 동아닷컴 기자 phoebe@donga.com

영상=이철 동아닷컴 기자 kino2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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