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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8년 12월 4일 02시 5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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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디 오페라 중에서 가장 긴 이 ‘돈 카를로’를 끌고 나가는 중요한 힘은 역시 복잡한 캐릭터를 가진 비극적인 등장인물들의 깊이 있는 소화력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인공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대형 아리아의 해석에 빼어났다.
왕자 돈 카를로 역의 테너 박현재는 품위 있고 안정감 있는 가창으로 ‘퐁텐블로, 쓸쓸한 숲이여’를 불렀고 왕자의 약혼자였다가 결국 부왕 필리포의 왕비가 된 엘리자베타 역의 소프라노 김향란도 품격 있는 관록의 가창으로 마지막 ‘세상의 허무함을 아시는 신이여’를 토해냈다. 최고 권력을 가졌지만 그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스페인 왕 필리포 역의 베이스 김요한도 ‘그녀는 날 사랑한 적이 없다’에서 자신의 슬픔을 처절히 노래했고 플랑드르 해방을 위해 싸우는 정의의 사나이 로드리고 역의 한경석은 후반부로 갈수록 진가를 드러내며 ‘내 최후의 날’에서 감정선을 빼어나게 살린 가창을 들려줘 청중을 감동시켰다.
반면 에볼리 역의 메조소프라노 김학남은 실망스러웠다. 돈 카를로를 짝사랑하는 에볼리 공녀가 지녀야 하는 섬세한 스케일 처리가 이뤄지지 않았으며 아리아 ‘나의 미모를 저주한다’에서는 고음이 전혀 나오지 않았다. 한국을 대표하는 메조소프라노로 무대를 장악하던 김학남의 이번 무대는 명성에 걸맞지 않은 것이었다.
카를로 데 루치아의 연출은 무난했지만 스페인 왕 필리포가 “왕자의 칼을 빼앗아라”라고 외치는 장면에서 창을 든 호위병들마저 대사에 전혀 반응하지 않고 뻣뻣하게 서있는 모습은 이해하기 힘든 연출이었다. 또 반주를 맡은 경기필은 금관이 매우 중요한 ‘돈 카를로’에서 금관의 잦은 실수로 오히려 극에 힘을 실어주지 못했다. 이번 ‘돈 카를로’는 전체적으로 만족스러웠지만 등장인물들이 이렇게 훌륭한 가창을 들려준 베르디의 작품을 실내 무대에서 꼭 확성된 음향으로 들어야만 하는지 묻게 된다. 예전처럼 세종문화회관에서 자연음향으로 오페라를 볼 수는 없는 것일까?
장일범 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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