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에코의 박물관에서 삶의 축제를 즐기자”

  • 입력 2008년 6월 28일 02시 58분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움베르토 에코 지음·이세욱 옮김/730쪽(상·하)·각권 1만800원·열린책들

움페르토 에코는 자신의 최근작인 이 소설에서 자신의 백과사전적 지식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수십 편의 시와 소설은 물론이고, 영화 만화 음악 회화 포스터 사진 삽화 그리고 음식 레시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의 문화 정보가 한 편의 장편소설 속에 풍요롭게 망라되어 있다. 마치 에코가 살아온 시대와 장소들의 특징을 모두 담고 있는 박물관에라도 들어온 듯하다. 이는 문학사적으로도 유례가 드문 일이다.

산만하거나 난삽하지 않을까 우려하지 않아도 된다. 그가 구사하는 문체는 함축적이고 시적이면서도, 평이하고 명료하다. 정보 중 상당수가 포스터, 삽화 등 인쇄물의 형태로 책 속에 삽입되어 있다. 에코 자신이 이미지 시대에 맞는 새로운 글쓰기 방법을 고안하고자 고심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소설의 기본 줄거리는 이미 많은 작가가 다룬 바 있는 낯익은 틀에 바탕을 두고 있다. 주인공은 고서적 전문가 잠바티스타 보도니, 일명 얌보라는 인물이다. 기억을 상실한 그가 잃어버린 자신의 과거를 되살리는 과정이 서사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에코는 기발한 방식으로 ‘낯설게 하기’ 전략을 구사한다. 얌보의 기억상실은 특이하다. 자신의 지나온 삶을 구성하는 특징적인 외부 정보들은 모두 기억하고 있는데, 정작 그것들을 연결짓는 고리들, 바로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역사는 깨끗이 지워져 있는 것이다.

에코의 기호학자다운 면모가 드러나는 게 이 부분이다. 기호는 그 자체로는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또한 에코에게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는 각기 하나의 기호이자 텍스트다. 이쯤에서 에코의 메시지는 분명히 드러난다. 우리의 문화란 곧 우리가 성장하는 중에 우리의 내면이 겪게 되는 여러 국면을 텍스트화한 것이다. 따라서 역으로 텍스트들을 다시 해독하고 조합함으로써 우리 내면에 대한 새로운 이해도 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이제 얌보에게 과제가 주어진다. 그것은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텍스트들을 다시 읽고 확인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삶이라는 텍스트를 총체적으로 복원하는 일이다. 얌보는 우선 자신이 실제로 경험한 일상을 되살리는 데 주력하고, 어느 정도 결실을 거둔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구체적인 디테일이 대부분 다시 찾아든 후에도 첫사랑 릴라의 얼굴은 도무지 떠올릴 수 없다.

작품 전체에 걸쳐 ‘첫사랑’은 주된 테마로 부각되어 있다. 그러나 첫사랑, 혹은 첫사랑의 얼굴은 얌보의 삶에서 궁극적인 진실로 통하는 열쇠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 열쇠는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할 수 있다. 얌보가 첫사랑의 얼굴과 끝내 다시 만나지 못하는 것도, 그것이 구체적인 텍스트나 일상적인 기억으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지점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이제 그가 취해야 하는 마지막 방도는 이른바 연금술이다. 연금술은 모든 상이한 것을 한데 섞어 신비로운 화학작용을 일으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얌보는 첫사랑의 얼굴을 복원하기 위해 자신의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실제 인물들과 텍스트 속 인물들의 얼굴을 층층이 쌓아올린다. 바야흐로 분명히 변별되는 기호들, 혹은 텍스트들이 코마 상태에 빠진 얌보의 의식 속에서 서로 어지럽게 어우러지며 연금술적 모험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험의 끝에서, 마침내 가슴 두근거리는 불안감과 고통스러운 열락이 합쳐지는 첫사랑의 순간이 찾아들고, 바로 그때 삶을 미혹 속에 빠뜨리는 ‘안개’ 속에서 삶의 진수인 ‘신비한 불꽃’이 타오르기에 이른다. 이는 곧 모험의 전 과정이 축제로 마무리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얌보는 망각과 싸움을 벌이는 노작가 에코의 다른 모습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다분히 자전적인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에코는 얌보가 자신이 아니라고 잘라 말했다지만, 부질없는 일이다. 소설 속 구절처럼, 인생은 한바탕의 꿈이고, “우리는 꿈속에서 남의 추억을 자기 것으로 삼기도”(하권 682쪽) 하기 때문이다. 그는 내내 축축한 안개 속에 젖어들어 있는 우리 삶의 미로 속에서 모험이 곧 축제고 축제가 곧 모험임을 일깨우고 있다.

최수철 소설가·한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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