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한없이 가벼워진 연극판에 깊은 울림 전하고 싶었다”

  • 입력 2008년 6월 19일 02시 56분


연극 ‘달이 물로 걸어오듯’ 중 검사(가운데)가 수남(오른쪽)과 경자를 대질 신문하는 장면. ‘의심하지 않았던’ 사랑 때문에 기꺼이 살인죄를 뒤집어썼던 수남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 사랑을 의심하게 된다. 사진 제공 산울림
연극 ‘달이 물로 걸어오듯’ 중 검사(가운데)가 수남(오른쪽)과 경자를 대질 신문하는 장면. ‘의심하지 않았던’ 사랑 때문에 기꺼이 살인죄를 뒤집어썼던 수남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 사랑을 의심하게 된다. 사진 제공 산울림
‘연극연출가 대행진’ 1탄-극단 산울림 ‘달이 물로 걸어오듯’

《객석은 한동안 침묵이었다. 박수 소리는 천천히 터져 나왔다. 그러나 힘차고 오래 계속됐다. 17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 산울림 소극장에서 열린 ‘달이 물로 걸어오듯’(고연옥 작·임영웅 연출)의 첫날 공연. 한국 연극 100년을 기념해 극단 산울림 대표 임영웅(72) 씨가 기획한 ‘연극연출가 대행진’의 첫 작품이었다.》

‘연극연출가 대행진’은 임영웅 씨를 비롯해 심재찬 김광보 박근형 이성열 씨 등 연극계 대표 연출가들의 신작을 선보이는 시리즈. 연극평론가 유민영 한양대 교수의 말처럼 “연극 100년의 해에 국립극단이나 시립극단이 해야 할 화급한 연극운동이지만, 임 씨가 자신의 업으로 알고 외롭게 분투하고 있는 것”이다.

연극 ‘달이 물로 걸어오듯’은 시적인 제목과 달리 잔혹한 살인사건이 소재다. 스무 살 아래인 술집 여종업원 경자와 결혼한 화물차 운전사 수남. 일을 마친 뒤 새벽녘 집에 돌아온 수남에게 만삭의 아내 경자가 보여준 것은 경자의 의붓어머니와 동생의 시체다. 배 속의 아기와 아내를 위해 수남은 살인죄를 뒤집어쓰기로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아내의 속내가 의심스럽다. 경자는 정말 수남을 사랑했던 걸까, 처음부터 그를 이용하기 위해 접근했던 걸까.

임 씨가 묵직한 작품을 무대에 올린 이유는 무얼까. 그는 “경박함에 대항하기 위해서”라고 답했다. 그가 가리키는 경박함은 최근 대학로의 연극 풍토다. 100년의 역사가 쌓인 오늘인데, 말장난과 유머에만 몰두하느라 무게감을 잃어버린 연극이 임 씨는 그렇게 안타까울 수 없다.

임 씨의 승부수는 진지함이다. 객석에서 간간이 웃음이 나오긴 하지만, 관객들은 이내 연극의 무거운 테마에 빠져 든다.

“남자와 여자는 달이 물로 걸어오듯 만나는 거야. 달빛을 받으면 시궁창도 샘물이 되지. 달은 하늘에, 물은 땅에 있지만 그 둘이 만나는 건 아무도 몰라. 안다 해도 말릴 수 없어.”(연극에 등장하는 술집 마담의 대사)

그러나 이렇게 아름답게 표현되는 사랑 이야기는 의혹과 의심으로 변질된다. 벽과 바닥을 온통 신문지로 발라 말과 사건으로 넘쳐나는 세상을 상징한 무대에서, 오가는 말 속에 ‘사랑’은 점점 ‘믿지 못할 것’이 돼버린다.

“원래 사람은 ‘달이 물로 걸어오듯’ 만나서, 사귀고, 사랑하고, 함께 살다가 죽어가는 것인데…. 사람 사이의 소통이 진솔하지 못한 것, 믿음이 실종된 인간관계를 언제부턴가 수없이 경험하게 된 현실을 짚고 싶었던 겁니다.”

관객들과 함께 객석에서 연극을 지켜본 임 씨의 설명이다. 수남 역을 맡은 배우 박상종 씨도 “관객들이 진지하게 몰입하는 데 놀랐다”면서 “가벼움 일색인 최근의 연극판에 깊은 울림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연극이 끝난 뒤 만난 한 여성 관객은 “연극이 사회와의 교감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점을 새삼 절감했다”고 말했다. 소극장 산울림의 큰 기획이 얻어내기 시작한 성과를 상징하는 말이기도 했다.

7월 27일까지. 평일 오후 8시, 토요일 오후 3시 7시, 일요일 오후 3시(월 쉼). 2만∼3만 원. 02-334-5915, 5925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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