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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8년 4월 2일 0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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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진(29·서울 서대문구) 씨는 3개월 전 기억하기도 싫은 일을 경험했다. 연극배우인 김 씨는 대학로에서 오후 11시 공연을 마치고 동료들과 뒤풀이를 한 후 집에 가던 중 골목길에서 한 40대 남성과 마주쳤다. 술에 잔뜩 취한 남성은 자신에게 다가오더니 팔을 잡아끌기 시작했다. 김 씨는 너무 놀라 저항도 못하고 10m 정도 끌려간 후에야 이웃 주민의 도움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평소 운동을 많이 해 어느 정도 ‘힘을 쓴다’고 자신했는데 술 취한 남자 한 명에게 꼼짝 못하고 끌려가다니….” 그로부터 3개월 후. 그녀는 도복을 입고 있다.》
○ “배우고 나니 몸보다 마음이 먼저 달라져요”
“으라차차!”
29일 오전 11시. 서울 중구 을지로 5가에 위치한 대한호신술협회 체육관.
김 씨는 도복 차림으로 호신술 동작을 연습하고 있다. 김 씨 외에도 호신술을 배우는 회원 18명 중 16명이 여성이다. 주로 20, 30대 여성들이다.
호신술은 치한, 강도 등을 만났을 때 대처하는 무술이다. 최근 여성과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유괴, 납치, 살인 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하면서 호신술이 주목을 받고 있다. 호신술을 배우는 여성이 늘면서 국내 호신술 여성 인구는 2만여 명에 달한다.
“동작은 부드럽게 하나로 연결해야 합니다. 기합을 넣어주세요.”
사범의 지시에 맞춰 2인 1조로 동작을 익히는 여성들의 얼굴에서는 진지한 빛이 넘친다. 너무 몰입했을까. 김 씨와 짝을 이뤄 연습을 하던 여성이 짝을 바꿔 달라고 한다.
“너무 열심히 하시니까 겁이 나요.”
김 씨는 약간 무안한지 “세게 친 것도 아닌데…”라며 상대방의 어깨를 툭툭 쳤다.
이들이 주로 연습하는 동작은 △팔 부위를 잡고 끌려가기 △뒤에서 껴안기 △앞에서 껴안기 등 3가지다(그림 설명). 여성들이 가장 빈번하게 치한에게 공격받는 상황이다. 팔을 잡혔을 때 대처하는 동작을 연습하던 직장인 강보경(38·경기 성남시 하대원동) 씨는 땀을 닦으며 “호신술을 배우니 육체보다 정신적으로 달라졌다”고 말했다.
“수영도 처음에는 물이 무서워서 못 뜨다가 그걸 극복해야 뜨잖아요. 치한에게 잡히면 무서워서 아무 생각도 안 나는데 호신술을 배우고 나니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자신감이 생기니 치한에게 잡히기 전에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상황 판단력이 생기는 거죠.”
김 씨는 최근에는 열한 살짜리 딸에게도 틈틈이 호신술을 가르치고 있다,
○ 상황에 따른 기술 반복연습… 온몸 운동 효과
호신술이 여성에게 인기 있는 이유가 뭘까.
직장인 최은채(26·여) 씨는 “다른 무술이 공격에 치중하는 데 비해 호신술은 방어 위주라서 비교적 여성의 성격에 잘 맞는 것 같다”고 말했다.
호신술은 방어를 중시하다 보니 확률을 중시한다. 여기서 확률은 ‘위기를 벗어날 확률’이다. 아무리 다양한 동작을 배워도 실제 위기 상황에서 제대로 써먹지 못하면 소용없다. 따라서 호신술은 여러 가지 기술을 익히기보다 구체적 상황에 따라 몇 가지 기술을 중점적으로 배운다.
보통 호신술 동작 1∼3개만 알면 어느 정도 위기상황에 대처할 수 있다. 보통 여성의 경우 1주일에 2시간씩 3개월 정도 연습하면 3가지 기초 동작을 어려움 없이 구사할 수 있다.
전문가들은 호신술이 ‘몸 지키기’뿐 아니라 ‘건강 지키기’에도 효과적이라고 말한다.
호신술은 사람의 신체 각 부위의 힘의 세기를 정확히 알고 전신의 힘을 동시에 사용하는 것이 핵심이다.
손, 팔, 다리, 몸통, 어깨 등 신체 부위별로 힘의 세기가 다른 것을 이용한다. 예를 들어 상대가 팔의 힘으로 멱살을 잡으면 자신의 팔 힘만으로 상대 팔을 비틀어 빠져나오기보다 몸통, 허리, 팔의 힘 전체로 힘의 우위를 점해야 한다.(그림 2)
조원상 대한호신술협회 이사는 “상대는 나보다 힘이 세고 크기 때문에 ‘호신(護身)’인 것”이라며 “야구에서 팔로만 스윙을 하기보다 어깨에 힘을 빼고 하체 힘을 이용해 부드럽게 스윙을 하면 공이 멀리 나가는 것과 비슷한 원리”라고 말했다.
온몸의 힘을 동시에 활용하는 원리를 이용하다 보니 요가처럼 몸의 자세를 잡아주고 전신을 고르게 단련시킨다. 김다영(14·경기 광주시) 양은 “호신술을 시작한 후 친구들에게서 ‘몸매가 예뻐졌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고 말했다.
택시 운전사인 구본선(49·경남 창원시) 씨 가족은 요즘 호신술에 푹 빠졌다.
구 씨와 부인 이경자(46) 씨, 아들 한모(18) 군, 딸 은희(16) 양은 오후 9시면 거실에 모여 컴퓨터 동영상을 보며 각자 호신술 동작을 연습한다. 호신술의 수요가 많아지자 호신술협회는 올 2월 인터넷사이트(www.hosinsul.net)를 통해 호신술 동영상 강좌를 개설했다.
구 씨는 “택시를 운전하다가 혹시 강도를 만나게 될지 몰라서 호신술을 배우게 됐다”고 말했다.
아들 한모 군은 “어머니가 요즘 유괴 납치 뉴스를 많이 접하시면서 ‘같이 호신술 연습하자’고 하신다”면서 “호신술로 몸도 다지고 가족 간 정도 깊어졌다”고 말했다.
김윤종 기자 zozo@donga.com
호신술의 구체적인 동작을 익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위험한 상황에 처했을 때의 기본적인 행동 수칙을 함께 숙지해야 큰 피해를 사전에 예방할 확률이 높다. 호신술 전문가들에게 ‘밤거리 호신술 3대 행동수칙’을 알아봤다.
○ 위험은 예방이 최선
조원상 대한호신술협회 이사는 “호신술은 몸을 보호하는 ‘최고의 수단’이 아니라 ‘최후의 수단’”이라고 말한다. 호신술을 안 쓰고 몸을 보호하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것. 위험이 다가오기 전에 미리 예방하는 것이 호신술의 가장 중요한 원칙이다. 밤에는 좁은 골목길 등을 피한다. 부득이 인적이 드문 곳을 다닌다면 휴대전화 통화를 하면서 걸어가는 것이 좋다. 보통 범법자들은 통화를 하며 외부와 연결된 상대를 범행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범행 상황이 전달돼 덜미를 잡힐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호루라기를 지니고 다니는 것도 좋다.
○ 승부는 타이밍이다
어설프게 호신술로 대항하다가 오히려 더 큰 화를 당할 수도 있다. 호신술에서 ‘어설프게 대처하는 것‘은 ‘타이밍을 놓치는 것’과 같은 의미다. 범법자에게 끌려가거나 위협을 당할 때 처음부터 호신술 동작을 취하거나 저항을 하면 안 된다. 범인을 긴장하게 만들어 역효과가 난다. 상대가 잡아당길 때 일단 힘을 빼고 약간 끌려가는 느낌을 주면 범법자가 안심하게 된다. 끌어당기는 힘이 약해졌을 때 틈을 봐서 호신술을 사용한다.
사재훈 국민대 경호비서학과 교수는 “호신술은 타이밍을 잡아 정확히 구사하면 100% 효과를 낼 수 있다”고 말했다.
○ 상대를 제압하려 들지 말라
여성이 호신술을 쓸 경우 상대를 제압하는 것이 아니라 벗어날 수 있는 최소한의 시간을 버는 것이 핵심이다. 기술을 이용해 상대를 넘어뜨려 7∼10초의 시간만 벌어도 40m 정도 벗어날 수 있다. 상대를 넘어뜨린 후 계속 공격하지 말고 발로 한 차례 찬 후 위험 장소에서 신속히 벗어나는 것이 중요하다. 위험 장소를 벗어날 때 주변을 잘 살펴야 한다. 정신없이 뛰다가 더 외진 곳으로 갈 수도 있다.
김윤종 기자 zoz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