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 읽는 세상]불현듯 꽃 터진다 生이 부르르 떨린다

  • 입력 2008년 3월 11일 02시 54분


우수에 경칩도 지나 부드러운 기운이 대기에 감돈다. 꽃이 피기는 아직 이른 봄날, 그래서 울긋불긋한 꽃들에 대한 허기가 가장 커지는 것도 이맘때가 아닌가 싶다. 책상 위에 쌓여가는 전시 도록들을 펼쳐 보니 꽃들은 벌써 여기저기서 함박웃음을 터뜨린다. 한발 앞서 봄을 맞고 싶다면 갤러리 산책에 나서볼 때다. 우연히 어느 전시장 모퉁이에서 마주치는 꽃그늘, 그 설렘을 기대하면서.

‘매화는 다른 봄꽃처럼 성급히 서둘지 않습니다. 그 몸가짐이 어느 댁 규수처럼 아주 신중합니다. 햇볕을 가장 많이 받은 가지 쪽에서부터 한 송이가 문득 피어나면 잇따라 두 송이, 세 송이…다섯 송이, 열 송이…이렇게 꽃차례 서듯이 무수한 꽃숭어리들이 수런수런 열립니다.’(박정만의 ‘매화’)

퇴계 이황의 매화 사랑은 각별했다고 한다. 추위를 견디고 이른 봄 제일 먼저 피어나는 매화를 즐겨 시로 썼고, 세상 떠날 때 ‘매화에 물을 주어라’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고 할 정도로. 인의예지(仁義禮智), 즉 사람의 도리를 찾고자 했던 선비들이 사군자 중 하나로 아꼈던 매화. 그 붉고 하얀 꽃잎들이 지금 여기 살굿빛 한지 위에 후두둑 흩어져 있다. 박여숙화랑에서 열리는 직헌 허달재의 ‘滿開’전 풍경이다. 남종화의 대가 허백련의 장손인 직헌이 문인화의 틀에 가두지 않고 현대적 감성을 스며들게 한 그림들. 폭죽이라도 터진 듯 눈길 가는 곳마다 꽃 잔치다. 매화뿐 아니라 맨드라미와 수국까지 앞 다퉈 은은한 눈부심을 선사한다.

사군자를 통해 인간의 정취와 품격을 드러내는 시절을 지나, 이제 꽃은 그 다양한 얼굴로 인간의 감정과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매개로 흔히 활용된다.

서양화에서 출발해 시각이미지의 전 영역을 탐색해온 양만기가 보여주는 미디어 아트 작품 ‘Layers34523’(140×140cm·2007). 13∼31일 예화랑에서 ‘미디어 아키텍쳐’란 주제 아래 선보이는 이 꽃은 실재하지 않는다. 가상세계의 이미지를 재조합해 만들어낸 이미지일 뿐이다. 자동차도장 재료로 수십번 덧칠해 반짝거리는 꽃은 세련되면서 인공적이다. 마치 조화처럼. 실재보다 가상의 미디어 세계를 더 신뢰하는 도시인들에겐 그래서 더 친숙하다.

꽃에 대한 관습적 해석을 뒤집는 작품들은 보는 이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더화이트갤러리에서 색면추상 같은 색다른 꽃을 보여주는 최선호, 대안공간 충정각에서 열리는 기획전 ‘꽃.이다!’전에서 꽃과 인물을 결합해 자화상 같은 드로잉을 내놓은 임주리, 꽃답다는 개념을 거부하고 꽃이란 활자를 형상화한 장준석 등이 그렇다. 서울 조현갤러리에 걸린 김은주의 ‘가만히 꽃을 그려보다’는 연필로 그려낸 검은 꽃이다. 수없는 반복의 동작은 꽃잎에서 출발해 어느새 화면을 채우는 커다란 꽃으로 피어나 묘한 울림을 던진다. ‘사람들은 꽃을 좋아하지만/그것이 얼마마한 아픔 끝에 피어나는지는 제대로 알지 못한다.’(김종길의 ‘아픔’) 실제든 그림이든 꽃을 피워 올리는 일은 결코 쉬운 게 아닌가 보다.

천신만고 끝에 피어났다 해도 꽃이 져야 열매 맺는 것이 자연의 이치. 꽃의 여정은 사람의 그것과 비슷하다. 한 번 피어 짧고 덧없이 스러진다. ‘같은 눈 같은 가지에/다시 피는 꽃은 없다/언제나 새 가지 새 눈에 꼭/한번만 핀다네’(백무산의 ‘꽃은 단 한번만 핀다’). 인간의 생 역시 무딘 재주와 서툰 몸짓으로 피워 올리는 단 한 송이의 꽃이 아니던가.

저마다의 목소리로 이야기를 들려주는 전시장의 꽃들을 보면서 우리네 삶을 들여다보게 된다. 좌절과 굴욕이라고 생각하는 것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카멜레온처럼 변신하는 인간들. 꽃들은 ‘너만의 색깔을 가져도 괜찮다’고 말없는 말을 들려준다.

무얼 위해 사는지도 잊은 채 종종거리며 돌아다니는 하루하루. 제 마음마저 어디 두었는지 못 찾고 곤고한 몸을 이끌고 허둥지둥 헤매다 날은 저문다. 늘 그 자리에 말없이 서있는 ‘꽃’들을 스쳐 지나며.

‘내려갈 때/보았네/올라갈 때/보지 못한/그 꽃’(고은의 ‘그 꽃’)

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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