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오르는 사회불만, 문화재로 옮겨붙는다

  • 입력 2008년 2월 13일 02시 50분


최근 문화재 훼손 ‘反사회적 반달리즘’ 경향 뚜렷

11일 경찰에 붙잡힌 숭례문 방화 용의자 채모(70) 씨의 범행 동기는 토지 보상금이 적은 것에 대한 불만이었다. 채 씨는 같은 이유로 2006년 4월 서울 창경궁 문정전에 불을 질렀다가 잡혀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숭례문 방화 동기에는 당시 처벌이 부당하다는 불만도 포함된 것으로 드러났다.

정신의학계는 숭례문 방화 용의자로 지목된 채 씨가 고령에도 불구하고 방화 충동을 억제하지 못한 점, 의도와 계획을 가지고 반복적으로 방화를 한 점 등으로 미뤄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가졌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전홍진 삼성서울병원 정신과 교수는 “대개 분노는 시간이 지나면 수그러드는데 채 씨처럼 방화를 통해 분노를 지속적으로 표출하는 것은 반사회적 인격장애의 대표적인 증상”이라고 말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 증상이 반달리즘(문화예술 파괴)과 만난다는 점. 채 씨처럼 국가와 사회에 대한 개인적 불만을 문화재에 대한 테러로 표출하는 ‘반사회적 반달리즘’ 경향이 최근 뚜렷해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특히 불특정 다수나 일반 건축물이 아니라 국가적 상징성과 사회적 공공성이 강한 문화재로 그 타깃이 바뀌고 있는 상황이다. 2006년 5월 경제난으로 인한 불만 때문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수원 화성의 서장대 2층 누각을 잿더미로 만든 방화범 안모(26) 씨, 지난해 4월 트럭을 몰고 운현궁 정문으로 돌진한 신원 불명의 남성 등이 그 같은 예.

그렇다면 이들은 왜 하필 문화재를 노리는 것일까.

표창원 경찰대 교수는 “반사회적 반달리스트들은 일반 방화범과 달리 인명 피해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공공장소를 타깃으로 삼지 않는다”고 분석한다.

이들의 타깃은 국가나 사회 자체이기도 하지만 문화재 파괴로 힘들어질 공무원, 관료들이다. 이 같은 의도를 관철하는 데 문화재 파괴가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들은 또 타인들도 자신처럼 국가, 사회에 대한 불만을 갖고 있을 것이란 착각에 빠져 자신이 대표로 나서 문화재를 파괴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표 교수는 “방화범은 파괴 대상의 피해가 심각할수록 자신이 주목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전통이 오래된 문화재일수록 그 피해가 클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반사회적 반달리스트 중에는 부정적인 이미지의 문화재를 타깃으로 삼아 정의를 이루겠다는 이들도 있다. 지난해 붉은색 페인트로 사적 101호 삼전도비를 훼손한 백모(40) 씨가 대표적인 경우. 삼전도비는 병자호란 때 청나라 태종이 인조의 항복을 받은 뒤 세운 비석이다. 치욕의 역사가 기록된 삼전도비를 왜 보존하느냐는 반감에서 비롯된 행위였다.

이제 문화재는 언제 어디서 반달리스트의 공격을 받을지 모르는 상황이다. 이를 막을 방법은 없는 걸까.

전문가들은 덴마크 코펜하겐 항구의 명물 인어공주상 훼손 사건처럼 외국에서도 문화재 테러가 가끔 일어나지만 철저한 예방, 감시 시스템 때문에 대부분 미수에 그친다고 말한다.

국내에서도 문화재에 대한 접근을 통제하지 않으면서도 해당 지역이 집중 관리되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수상한 행동을 할 경우 바로 제지당할 수 있다거나, 중요 문화재에 가까이 갈 때는 소지품을 맡기게 하고, 보안이 필요한 문화재에 접근할 때는 절차를 밟게 하는 등의 체계가 갖춰지면 이상행동자가 금방 눈에 띌 수 있다는 것이다.

문화재 방화에 대해 강력한 처벌 규정이 없다는 것도 문제다. 문화재보호법에 따르면 방화행위는 형법 165조에 따른다고 돼 있다. 그러나 형법에는 문화재 방화를 가중 처벌하는 규정이 없고 차량이나 공중전화에 방화한 것과 같은 수준의 처벌을 받는다. 전문가들은 “2006년 문정전 방화처럼 인명 피해가 없다고 정상 참작돼 집행유예를 받은 것이 숭례문 화재라는 참사로 연결됐다”고 말했다.

한편 전문가들은 방화 범죄의 특성을 고려할 때 문화재에 대한 추가 모방 범죄 가능성도 우려하고 있다. 표 교수는 “방화는 사회적인 주목도가 높기 때문에 모방 효과가 다른 범죄에 비해 높다”면서 “이번 사건으로 사회 불만을 가진 일부 사람들이 다른 문화재에 모방 범죄를 저지르는 것에 대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이진한 기자·의사 likeday@donga.com

:반달리즘(Vandalism):

문화의 유구한 역사를 무시한 채 문화유산이나 예술품을 파괴, 약탈하려는 경향을 뜻한다. 455년경 유럽의 민족 대이동 때 반달족이 로마를 점령해 약탈과 파괴를 일삼은 데서 유래했다. 2001년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이 세계 최대 마애불인 바미안 석불 파괴를 자행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 영상취재 : 신세기 동아닷컴 기자


▲ 영상취재 : 신세기, 박태근 동아닷컴 기자


▲ 영상취재 : 정영준, 박태근 동아닷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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