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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7년 9월 29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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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 이론으로는 시장의 신비를 벗겨 낼 수 없다. 교과서에 담긴 경제학 이론은 시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설명해 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로 야심만만한 발언이다. 미국 스탠퍼드대 경영대학원 교수로 활약하다 올해 3월 암으로 숨진 저자는 고전경제학이 그처럼 찬미해 왔으면서도 제대로 설명하지 않은 시장의 작동원리에 대해 설명해 주겠다고 선언한다. 그것도 “이야기 전달에서 경제학자들이 소설가보다 나을 때도 있다”라는 페루의 소설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생각이 옳음을 입증하겠다고 호언장담을 펼친다.
이쯤 되면 선동적인 삼류 경제학자를 떠올릴 만하다. 그런데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들이 앞 다퉈 이 책을 극찬했다. 강력한 시장옹호론을 펼친 케네스 애로와 시장논리의 무한확대를 비판한 정보경제학자 조지프 스티글리츠가 대표적 경우다.
복잡한 수식과 추상적 이론으로 무장한 이들의 행복한 동거가 이뤄지는 둥지는 바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구체적 시장이다. 저자는 고대부터 이어져 온 중동의 전통 시장 바자르에서 인터넷 경매시장 이베이를 넘나들고 축구장 125개를 합친 면적의 네덜란드 세계 최대 꽃시장과 계획경제에서 시장경제로 전환 중인 베트남 하노이의 노점상을 오가며 시장의 왕성한 생명력을 생생히 보여 준다. 그에 따르면 그 생명력의 원천으로서 시장의 영혼이 ‘자유로운 거래’라면 그 영혼이 깃들 수 있는 튼튼한 신체는 그 거래비용을 최소화하는 ‘시장설계’에 달렸다.
거래비용을 줄이기 위해선 먼저 거래될 물품의 소유주가 명확해야 하고, 가격과 제품에 대한 정보가 자유롭게 소통돼야 하며 거래 당사자 간에 상호 신뢰할 수 있는 시스템과 건전한 경쟁이 이뤄질 수 있는 시스템이 구축돼야 한다. 이러한 시장설계는 많은 경우 시장참여자들에 의해 이뤄지기도 하지만 정치와 문화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래서 국가의 역할 또는 정부의 개입이 필요하다.
뉴질랜드 출신의 저자는 이런 시장의 발전단계를 공차기 게임의 발전사에 비유한다. 19세기 초까지 수백 년간 돼지 방광에 건초를 채워 넣은 공을 놓고 우격다짐으로 힘겨루기를 펼치던 영국식 민속게임은 언제 어디서나 어김없이 등장하는 시장의 원형이다. 심판도 없고 룰도 없이 게임 참가자들끼리 공을 차지하기 위해 피를 흘리며 치고받고 싸우던 이 민속게임이 축구와 럭비, 미식축구라는 세련된 스포츠로 분화, 발전하게 된 것은 그에 걸맞은 경기 규칙이 마련됐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시장설계를 위해선 1863년과 1871년 창설된 풋볼연합과 럭비풋볼연합과 같은 ‘게임의 규칙’을 만들어 낼 시장통제기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는 시장의 능력을 찬미할지언정 결코 시장을 무소불위의 전지전능한 신으로 신비화하지 않는다. 그는 시장을 ‘만악의 근원’으로 치부하는 좌파이론가 못지않게 시장을 ‘만병통치약’으로 숭배하는 우파이론가들을 사이비 맹신자라고 비판한다.
저자는 빈곤 문제에 대한 최선의 해결책이 분배가 아닌 성장임을 구체적 통계와 다양한 사례로 보여 준다. 그러나 그 성장이 지속되려면 거래비용을 줄이기 위한 ‘시장설계’의 논리에 따라 불평등의 해소(분배)가 반드시 수반돼야 한다. 비록 정부의 역할에 무수한 오류가 따르고 정부지출이 줄어드는 ‘작은 정부’가 바람직하다 하지만 정부역할이 빠진 시장만으로는 올바른 시장설계가 이뤄질 수 없다. 저자는 이를 1995년 유엔평화유지군이 철군한 뒤 정부 없이 시장논리만 작동했던 소말리아 경제의 파국적 상황에 대한 생생한 사례를 들어 설명한다.
따라서 ‘시장 또는 국가’라는 논법은 ‘시장과 국가’로 바뀌어야 하고 ‘성장이냐 분배냐’는 화법 또한 ‘성장을 통한 분배’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다.
인상적인 것은 세계화시대 상호대립성이 부각돼 온 민주주의와 시장시스템을 ‘차악(次惡)의 시스템’으로 동질화하는 저자의 시각이다. 이들 시스템에 대해 그는 첫째 다양성을 허용한다는 점에서, 둘째 비판을 허용한다는 점에서 두 번의 찬사로 족하다며 세 번째 찬사는 유보한다. 우상화를 경계하는 그런 절제의 지혜가 필요할 때다. 원제 ‘Reinventing the Bazaar’(2003년).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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