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85년 美여교사 우주비행사 선발

  • 입력 2006년 7월 19일 03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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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비행사로 뽑히기 전까지 그의 삶은 평범했다.

‘30대 중반에 아들과 딸을 하나씩 둔 여교사.’ 이것이 크리스타 매콜리프(1948∼1986)의 자기소개서였다.

굳이 특별한 걸 찾으라면 학창 시절 아폴로 계획을 보며 유난히 감동을 받았다는 점과 매우 열정적이고 재미있게 수업을 진행하는 인기 교사라는 점 정도였다.

어릴 적부터 여성으로선 드물게 우주에 관심이 많았다.

“우주선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 지구상의 무엇이 중력에서 벗어나 우주 궤도에 올라가는 것에 매료됐다. 하지만 꿈도 꾸지 못했다. 내가 어릴 때 여성은 우주비행을 하지 않았으니까.”

고교에서 미국사와 법, 경제학을 가르치던 그는 1984년 교사를 우주왕복선에 태워 우주로 보낸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우주에서 진행하는 강의를 지구상으로 중계한다는 게 미 항공우주국(NASA)의 계획이었다.

매콜리프는 지원했고, 1985년 7월 19일 첫 민간인 우주비행사로 선발됐다는 통보를 받았다. 경쟁률은 1만1000 대 1이었다.

그리고 운명의 1986년 1월 28일. 그가 탑승한 미국의 우주왕복선 챌린저호는 이륙 후 75초 만에 폭발했다. 매콜리프는 9세 된 아들 스콧이 무사귀환을 기원하며 빌려 준 개구리 인형과 함께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났다.

우주비행사로 선발된 후 매콜리프는 래리 킹과 자니 카슨 등이 진행하는 TV 토크쇼에 잇따라 초청됐다. 유명인사가 됐다. 그만큼 챌린저호 참사는 미국인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하지만 가장 상심한 건 역시 가족이었다. 그들은 딸을, 아내를, 엄마를 잃었다. 가족은 그가 떠난 후 몇 년간 추수감사절도, 크리스마스도, 신년 행사도 챙기지 않았다.

“우리가 사랑했던 누군가가 없는데 기념일을 챙길 기분이 아니었다.”

매콜리프는 수업 시간에 평범한 사람들이 역사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곧잘 얘기했다. 왕이나 정치가, 장군만 중요한 게 아니라면서. 그는 자신이 첫 민간인 우주비행사가 돼 우주에서 수업을 하면 사람들이 교사라는 직업의 중요성을 새삼 느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그가 죽은 후 미국 곳곳에 매콜리프라는 이름을 붙인 학교가 여럿 들어섰다.

홍석민 기자 sm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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