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Design]실험정신, 상상력을 깨우다

  • 입력 2006년 2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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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드룩 디자인’이 지난해말 마련한 실험극 타입의 만찬. 참석자들은 냅킨을 대신하는 휘장의 구멍에 얼굴과 팔을 집어넣고 음식을 나눴다. 이같은 무한 상상과 실험이 네덜란드 디자인의 특징이다. 사진 제공 드룩 디자인
네덜란드 ‘드룩 디자인’이 지난해말 마련한 실험극 타입의 만찬. 참석자들은 냅킨을 대신하는 휘장의 구멍에 얼굴과 팔을 집어넣고 음식을 나눴다. 이같은 무한 상상과 실험이 네덜란드 디자인의 특징이다. 사진 제공 드룩 디자인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시내 중심에 자리 잡은 ‘드룩@홈’.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디자인 그룹인 ‘드룩 디자인’이 운영하는 전시·체험 공간이다.

지난해 말 이곳에서 특별한 만찬이 열렸다.

참석자는 푸드 디자이너 마리에 보겔장과 드룩 디자인의 초대를 받은 40여 명. 만찬장에 들어선 손님들은 우선 독특한 테이블 세팅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흰색 천으로 만든 휘장을 높은 천장에서 테이블까지 늘어뜨렸고, 천에는 여러 개의 구멍마저 뚫어 놓았다.

실험극을 방불케 하는 이 만찬의 콘셉트는 ‘나눔’이었다. 드룩 디자인은 손님들이 냅킨을 사용하는 수고를 덜 수 있도록 휘장 속에 얼굴과 팔을 집어넣어 테이블로 접근하도록 했다. 접시는 주변 사람들과 음식을 나눌 수 있게 둘로 나눠지게 디자인했다. 어떤 접시에는 햄만, 다른 접시에는 멜론만 놓여 있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드룩의 만찬 이벤트는 예술과 디자인의 경계가 모호한 네덜란드 디자인의 특징을 보여 준다. 네덜란드의 디자인은 무한 상상과 실험, 자연과 사물에 대한 철학적 성찰로 세계 디자인계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

○소규모 스튜디오의 실험정신

‘드룩@홈’에는 리카르트 휴튼, 헬라 용게리우스, 유르겐 베이, 마르셀 반더스 등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디자이너들의 작품이 곳곳에 전시돼 있다.

서랍들을 차곡차곡 쌓아 만든 옷장, 재활용 천 조각을 엮어 만든 의자, 긴 통나무를 눕힌 뒤 금속 의자 등받이 세 개를 군데군데 박아 만든 벤치….

네덜란드어로 ‘건조한(dry) 디자인’을 뜻하는 드룩 디자인은 보석·가구 디자이너인 하이스 바커와 예술역사가이며 비평가인 레니 라마커스가 1993년 설립했다.

유명 디자이너들과 그때그때 협업하고 젊은 디자이너를 발굴하는 프로젝트 디자인 그룹으로 10년 남짓 세계에 네덜란드 디자인을 뚜렷하게 각인시켰다.

네덜란드 디자인계는 드룩 디자인처럼 소규모 스튜디오 또는 독립 디자이너 중심으로 편성돼 있으며, 정부는 이런 풍토를 만드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네덜란드 문화부는 1998년 ‘시각·디자인·건축재단’을 창설해 지금까지 2만여 명의 디자이너와 작가를 지원했다. 전문가들이 선정한 디자이너들은 월급 형식의 생산 지원금을 받으며 일상의 부담에서 벗어나 마음껏 창조적 작업을 진행할 수 있다.

이 재단은 뉴욕 파리 이스탄불 등에 디자이너를 위한 해외 거주지를 만들어 자국 디자이너들이 다양한 문화를 경험하며 작품을 발전시키도록 돕는다. 비평가와 큐레이터를 위한 문화중재지원금과 출판지원금도 활발히 지원한다.

네덜란드 디자인재단이 지난해 펴낸 ‘창조적 경제의 디자인’ 자료에 따르면 네덜란드에는 4만6100명의 디자이너가 활동하고 있다. 시각 커뮤니케이션 영역에 2만7400명, 제품 디자인에 1만3900명, 공간 디자인에 4800명 등이다.

이들은 연간 3조1200억 원 규모의 디자인 산업을 움직여 네덜란드 국민총생산(GNP)의 0.7%를 차지한다. 이 규모는 자국의 교통산업(3조1200억 원)과 맞먹으며 정유산업(2조5200억 원) 규모를 넘어선다.

○노 디자인 노 스타일(No Design, No Style)

자연 상태의 통나무에 등받이를 설치해 앉을 수 있도록한 요르겐 베이의 ‘나무줄기벤치’. 사람의 손길을 최대한 절제한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사진 제공 드룩 디자인

네덜란드 디자인 잡지 ‘아이템스’의 헤르트 스탈 편집장은 간척사업을 통해 자연 재해를 막고 국토를 확장해 온 역사에서 디자인 발전의 뿌리를 찾는다. 방조제와 댐을 만들어 온 국가 전체가 곧 하나의 건축물이기 때문이다. 평론가들은 또 일찍부터 물류와 유통을 발전시킨 네덜란드인들의 자유로운 기질과 이질 문화에 대한 개방적 태도 덕분에 디자인이 꽃피고 있다고 말한다.

문화부의 말루 타이센 디자인 수석 자문관은 “2000년 이후 디자인이 동떨어진 영역이 아니라 과학 경제 교육 사회복지 등 각 분야와 유기적으로 연관을 맺으며 발전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 같은 역사와 전통을 토대로 네덜란드는 최근 상상력 넘치는 젊은 디자이너 중심으로 디자인 역사를 다시 쓰고 있다.

‘노 디자인 노 스타일’을 모토를 내세우는 드룩 디자인의 작품들은 때로는 놀랍고, 어리둥절하고, 따뜻하다. 30대 젊은 작가들은 의자 꽃병 밥그릇 램프 등 일반 생활 소품을 디자인한다. 그러나 그들은 종종 잡동사니 소재들을 고급 문화로 변모시킨 뒤 사용자가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해석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더욱 철학적이다.

드룩 디자인의 레니 라마커스 디렉터는 아래와 같은 말로 네덜란드 디자인의 메시지를 전했다.

“디자인은 더 많은 물건을 만들거나, 더 많은 재료를 사용하거나, 일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아이디어를 개발하는 게 아니다. 디자인은 현존하는 물건과 이미지, 공간과 아이디어의 가능성을 실험하고 확장하는 방법을 발견하는 일이다.”

암스테르담=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Wet 디자인’의 산실 EKWC▼

네덜란드 디자인계에서 드룩 디자인이 ‘건조한(Dry) 디자인’을 내세우는 데 반해 ‘젖은(Wet) 디자인’이라는 정반대의 개념을 내세우는 곳도 있다.

암스테르담 근교의 헤르토겐보스에 위치한 ‘유러피안 도자기 작업센터(EKWC)’가 그곳이다.

디자이너 집단거주 창작 공간인 이곳에는 매년 각국에서 도자기 관련 예술가, 디자이너, 건축가들이 모여들어 함께 생활하며 작업한다.

EKWC는 이곳에 머물 수 있는 기간을 3개월로 한정해 매년 45명 안팎의 디자이너에게 ‘기회’를 준다. 창조적이고 열정적인 디자이너들이 매일 한곳에 모여 빵을 굽고 커피를 끓이며 나누는 이야기는 기상천외한 것들이 많다.

EKWC는 생활공간과 작업공간을 제공해 줄 뿐 아니라 디자이너들이 함께 작업할 수 있는 팀도 직접 구성해 준다. 특별 프로젝트로 선정되면 정부는 매월 240여만 원의 보조금을 지급한다.

네덜란드의 차세대 디자이너로 손꼽히는 크리스 카벨(32)도 이곳에서 작업하고 있다. 그는 지난해 복원된 서울 청계천의 물 위에 아크릴 원반과 수초를 띄우는 작업을 통해 청계천을 디자인광장으로 꾸미기도 했다.

이곳 디자이너들은 한결같이 “가족 같은 분위기 속에서 서로 아이디어를 나누다 보면 상상력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헤르토겐보스=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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