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위크엔드]‘겨울연가 벤토’ 드셨어요?

입력 2005-11-11 03:10수정 2009-10-08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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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열차 여행의 독특한 문화로 자리잡은 벤토(도시락). 올해 초에는 한국 드라마 ‘겨울연가’ 인기를 반영한 벤토가 선풍을 일으키기도 했다. 사진 제공 아사히신문
배용준 최지우 주연의 드라마 ‘겨울연가’(후유노 소나타·冬のソナタ)가 일본에서 인기 바람을 일으켰던 올해 초. 도쿄 우에노 신주쿠 시나가와 오미야 등 도쿄 시내와 수도권의 열차역 매점에는 ‘후유노 소나타 벤토(도시락)’가 등장했다.

한류의 시장성을 포착한 벤토 회사가 ‘용사마’의 열성팬인 주부 고객용으로 한국 음식만으로 만든 도시락을 선보인 것이다. 내용물은 김치만두 떡볶이 불고기 해물잡채 나물 등 9가지. 가격은 1000엔으로 다른 벤토보다 다소 비싸지만, 한국 음식에 대한 호기심과 ‘맛있고 몸에도 좋다’는 입소문에 힘입어 무섭게 팔렸다.

20대 후반의 한 여성 회사원은 “지방 출장을 가면서 오전 8시쯤 우에노 역에서 ‘후유노 소나타 벤토’를 주문했는데 모두 팔렸더라”며 “기다려서 사려 했지만 오전 10시에야 새 벤토가 온다고 해 포기했다”고 전했다. 한 매점에서는 700개의 벤토가 순식간에 매진돼 판매원들이 손님을 돌려보내느라 진땀을 흘렸다.

‘후유노 소나타 벤토’는 일본 열차 여행의 필수품으로 꼽히는 에키벤의 일종이다. 에키벤은 역을 뜻하는 ‘에키’와 벤토의 앞글자인 ‘벤’을 따서 만든 일본식 조어. ‘역에서 파는 벤토’라는 뜻이다.

철도 왕국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일본 열도는 전국이 철도망으로 촘촘히 이어져 있다. 철도가 규슈 혼슈 시코쿠 홋카이도 등 4개의 섬을 연결하고 있어 남쪽의 후쿠오카에서 열차를 타고 최북단인 홋카이도에 닿을 수 있다.

에키벤은 일본인들의 유별난 벤토 선호 현상과 거미줄처럼 연결된 일본의 철도 시스템이 만들어 낸 일본 특유의 음식문화인 셈이다.

고속철도 신칸센의 기착지인 도쿄역 플랫폼. 이곳 매점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상품도 에키벤이다.

출근 승객들로 붐비는 이른 아침이면 검은색 양복을 차려입고 국내 출장을 떠나는 직장인들이 에키벤과 음료수를 사 들고 열차에 오른다. 온천 관광에 나선 노부부도, 어린 자녀를 동반한 젊은 부부도 모두 에키벤을 들고 있다.

공무원 노구치 가즈유키(野口一幸·46) 씨는 “신칸센 열차엔 대부분 식당칸이 있지만 특별한 때가 아니면 벤토로 식사를 해결한다”며 “지역별로 다른 에키벤의 맛과 디자인을 음미하는 것도 열차 여행의 묘미”라고 말했다.

에키벤의 역사는 일본의 근대화와 함께 처음 철도가 등장한 19세기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확한 집계는 없으나 지방의 시골역도 독자적인 에키벤을 갖고 있는 점을 고려하면 에키벤의 종류만 3000개가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에키벤은 지역의 문화적 자존심을 걸고 특산품을 사용해 맛깔스럽게 꾸민 ‘향토 요리’라는 점에서 미식가들의 관심도 높다. 바다와 가까운 지역의 에키벤에는 해산물 요리가 많고, 동북부 산간지역의 아키타 현처럼 토종 닭이 유명한 곳의 에키벤은 닭 요리 비중이 높다. 일본인들은 “에키벤을 먹어보지 않고는 그 지방의 전통과 문화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다”고 말한다.

에키벤이 일본의 음식 문화로 자리를 잡으면서 비(非) 승객용 수요도 갈수록 늘어나는 추세다. 도심의 직장인들이 입맛을 돋우기 위해 에키벤 업체에 배달을 의뢰하는가 하면 직접 역 구내 매점까지 찾아와 에키벤을 사가는 사례도 적지 않다. 일부 벤토 마니아들은 회식 메뉴를 에키벤으로 정하기도 한다.

일본의 에키벤 업자들은 내년 1월 도쿄 신주쿠의 한 백화점에서 열리는 ‘원조 에키벤 콘테스트’에 출품할 회심의 메뉴를 준비하느라 바쁘다. 내년으로 41회를 맞는 이 행사는 백화점 고객들이 직접 구매해 맛을 본 뒤 메뉴의 독창성과 가격 대비 만족도를 평가해 순위를 매긴다. 200여 종의 일본산 에키벤 외에도 해외 역에서 판매되는 외국 벤토 회사도 참가한다.

지난해는 하루 평균 10만 명이 몰려 2주일의 행사 기간에 40만여 개의 벤토가 팔렸다. 고급 재료만을 엄선해 만든 ‘특제 에키벤’은 개당 가격이 3000엔을 웃돌아 웬만한 호텔의 뷔페 요리 값과 맞먹을 정도다.

도쿄=박원재 특파원 parkw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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