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386중년, 청바지 다시 입는다

  • 입력 2005년 9월 9일 03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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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영화 ‘이유없는 반항’의 제임스 딘, 1970년대 노래 ‘아침 이슬’의 양희은, 2000년대 드라마 ‘봄날’의 조인성….

이들 셋의 공통분모는 뭘까. 아무런 연관이 없는 듯하지만 이들은 각 세대 ‘진(jean·청바지)’ 문화의 간판 아이콘이다.

한 손에 담배를 물고 눈가를 찡그리던 제임스 딘이 양복 바지를 입은 모습을 상상해 보라. 하얀 셔츠에 통기타를 멘 양희은이 무채색 롱스커트를 입고 무대에 올랐다면 한국의 청춘 문화사도 크게 바뀌었을 것이다.

이렇듯 청바지는 한국에서도 청춘과 동의어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어느덧 30대 중반을 넘긴 이들에게 스무 살의 청바지는 아련한 추억 속에서나 존재했을 뿐이다. 그랬던 그들이 지금, 진의 세계로 되돌아오고 있다.

1980년대 대학 시위를 진압하던 ‘백골단’의 청재킷이나 대학생들이 많이 입었던 스노진의 기억을 함께 가진 30대 중반 이후 중년 남자들이 다시 청바지를 입기 시작한 것이다.

최근 두드러진 이 현상은 단순한 복고 바람이 아니다. 구매력을 갖춘 이 세대는 체형과 이미지에 어울리는 청바지를 입기 위해 40만∼50만 원대에 이르는 고가의 프리미엄 청바지를 찾고 있다.

‘프리미엄 진’ 업계에서는 이 연령대의 남자들을 “실제 구매력을 갖춘 주요 소비자 층”(‘디젤’의 황경선 홍보주임)으로 꼽고 있다. 특히 주5일 근무 시대를 맞아 청바지는 필수 아이템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 청바지는 아이들 옷이 아냐!

삼성물산 건설부문 법무팀에서 일하는 김동준(35) 변호사는 최근 여자 친구에게서 ‘프리미엄 진’ 한 벌을 선물받았다. 김 변호사는 직장 생활을 하면서 청바지를 입을 일이 거의 없었다. 쇼핑할 때도 정장 스타일에 먼저 눈길이 갔고, 예전에 입었던 청바지는 몸에 맞지 않게 돼 멀어졌다.

그러나 최근 나들이에 마땅한 스타일을 찾지 못해 고민하던 김 변호사는 “프리미엄 진이 체형도 보완하고 몸에도 어울릴 것”이라는 조언을 듣고 40만 원대의 청바지를 구입했다.

사놓고도 한참을 망설이다 얼마 전 청바지를 입은 그는 여자 친구가 보여준 ‘뜨거운’ 반응에 놀랐다. “자연스럽다” “세련돼 보인다”며 기뻐하던 여자 친구는 “내가 직접 골라 주겠다”며 청바지를 한 벌 선물했다.

김 변호사는 “양복 슈트에 익숙해지면서 청바지는 가벼워 보이거나 아이들 옷이라는 고정관념에 젖었던 것 같다”며 “(청바지를) 입다 보니 가벼운 캐주얼 정장에도 잘 어울려 자주 찾는다”고 말했다.

패션업체인 ‘브레당’의 황선의(47) 본부장은 업계에서 이름난 청바지 애호가. 현재 가지고 있는 청바지만 50벌이 넘는다. 황 본부장은 “청바지는 질리지 않고 어떤 옷에도 어울리며, 젊음과 도전 정신을 표출할 수 있는 패션 아이템”이라고 말한다. 그는 정장을 입어야 하는 공식 석상용으로도 청바지를 선호한다.

지난달 신세계백화점에서 문을 연 프리미엄 진 매장 ‘루키 블루’. 남성 전용을 표방했으며 점심 시간 등을 이용해 이곳에서 청바지를 고르는 30, 40대 직장인들이 늘어나는 추세다.

몇 년 전만 해도 황 본부장처럼 회사의 임원이 청바지를 입는 것을 문제삼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정해진 틀을 깨기 위해’ 임원회의 때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참석하기도 했으며 지금은 사내 동료와 후배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신세계백화점 경영지원실의 정병권(43) 부장도 최근 30만 원대의 청바지 1벌을 구입했다.

야외 나들이를 가면서도 폴로셔츠나 면바지 같은 뻔한 ‘아저씨 스타일’의 평상복 외엔 마땅한 게 없었던 정 부장. 부인과 상의 끝에 청바지를 사기로 했지만 10, 20대가 입는 스타일은 어울리지도 않거니와 스스로도 내키지 않았다.

청바지를 서로 입겠다고 하는 정병권 부장(오른쪽)과 아들 윤성 군.
정 부장이 다시 청바지에 욕심이 생긴 건 우연히 들른 ‘프리미엄 진’ 매장에서 본 독특한 청바지 때문. 만만치 않은 가격 탓에 고민하다 청바지를 구입한 정 부장은 쌍둥이 아들 윤성과 인성(15) 군의 반응에 더 놀랐다.

두 아들은 “아빠가 청바지를 입으니까 활기찬 느낌이 든다” “이런 데 관심 없는 줄 알았는데 달라 보인다”며 자기 옷이라도 산 듯이 반겼다. 정 부장은 “청바지를 입으니 마음도 달라진 듯해 앞으로 자주 입을 것”이라며 웃었다.

○ 프리미엄 진에 몰리는 중년 남성들

청바지의 주소비층은 전통적으로 ‘1524(15∼24세)’이다. 그러나 한 벌에 40만 원을 웃도는 고가의 프리미엄 진 바람은 중년 남성들이 주도하고 있다.

이 같은 현상은 매장에서 뚜렷하게 볼 수 있다. 최근 서울 중구 신세계백화점 본점에 개장한 남성 전문 프리미엄 진 매장인 ‘루키 블루’에는 점심 시간에 청바지를 사려고 나온 넥타이를 맨 직장인들이 눈에 띄었다.

루키 블루 측에 따르면 10, 20대가 많이 찾아 오지만 실제로 구매하는 고객은 대부분 30대 중반 이상이다. 청바지 애호가인 가수 나훈아(58) 씨도 최근 이곳에서 대여섯벌의 청바지를 사 갔다.

매장 매니저 이영지(29) 씨는 “프리미엄 진이 체형의 약점을 감추고 하체를 길어 보이게 한다는 입소문이 돌면서 중년 고객들이 많이 찾고 있다”며 “처음엔 평범한 스타일을 찾다가 다음에는 독특한 자수 등이 새겨진 과감한 스타일을 선호하는 것도 이들 연령 대의 특징”이라고 귀띔했다.

중년 남성들이 새로운 소비층으로 등장하자 프리미엄 진 업체들은 이들을 겨냥한 프로모션과 이벤트를 펼치고 있다. 특히 고급 외제 승용차나 명품 브랜드들이 협력 프로모션을 제의해 오는 경우도 늘어나는 추세다.

프리미엄 진 업체 중 하나인 ‘디젤’의 홍보담당 황경선(30) 주임은 “이 연령층은 유행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만의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는 청바지를 선호한다”며 “이를 반영해 같은 스타일의 제품을 적게 출시해 희소성에 대한 만족감을 채워 주고 있다”고 말했다.

○ 우리의 청바지는 정장 이상이다

30대 후반∼40대 중반의 남성들이 프리미엄 진으로 몰리는 이유는 뭘까.

우선 중년 남자들의 프리미엄 진 바람은 청바지를 통해 젊음과 자유를 표현하고 싶은 욕망의 반영이라는 분석이 있다. 정장 슈트가 지닌 통념에서 해방된 청바지를 통해 편안하면서도 현대적인 이미지를 자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남성패션전문지 ‘GQ’의 이충걸(41) 편집장은 “현대 패션에선 청바지도 정장 셔츠나 재킷과 어울리는 하나의 ‘정장 아이템’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며 “중년 남성들의 패션에 대한 의식 전환은 보수적인 이미지를 벗어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국민대 의상디자인학과 이재정 교수는 1990년대 미국 벤처 열풍이 불면서 등장한 ‘영 머니(young money)’ 세대가 프리미엄 진을 입은 사례를 통해 한국 중년 남성들의 진 바람을 분석했다.

미국 벤처 세대는 기존 관습을 거부하면서도 젊은 세대와의 차별화를 추구하기 위해 기존 정장도 아니고 블루칼라나 10대가 입는 청바지와도 구분되는 ‘프리미엄 진’을 입었다는 것이다.

의상에서 보수성이 강한 미국 월스트리트에서 청바지를 ‘워크 웨어(work wear)’로 입기 시작한 것도 벤처 세대였다. 자신들의 정신적 자유를 외향적으로 맘껏 표현할 경제적 능력을 가진 이들이 월가의 분위기를 바꾸는 데 앞장섰던 것이다.

이 교수는 “한국의 30대 후반∼40대 중반도 1980, 90년대 소비문화 시대를 거치며 경제적 능력의 표출에 대해 익숙해진 세대”라면서 “프리미엄 진은 이들의 정신적 경제적 자유에 대한 표현 욕구를 담아내기에 적절한 무기”라고 말했다.

명지대 여가정보학과의 김정운 교수는 ‘아버지 세대와의 단절’을 추구했던 유럽 68 세대들의 모습을 통해 한국 중년 남성들의 프리미엄 진 바람을 분석했다. 청바지를 입고 저항과 혁명을 외친 68세대가 기성 세대가 된 뒤에도 여전히 ‘진’을 통해 정치적 문화적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68세대의 대표 주자이자 독일 외무장관인 요슈카 피셔가 처음으로 의원 선서를 할 때 청바지를 입고 등원한 게 그 사례다.

한국의 ‘386’ ‘475’ 세대를 비롯한 중년 남자들에게도 기존 질서에 대한 저항의 경험 등 ‘청년 문화’와 청바지는 동의어나 다름없다. 그랬던 이들이 경제적 능력도 갖추게 되면서 프리미엄 진을 통해 ‘청년 문화’를 표현하려 한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그러나 이들은 지나친 소비에 대한 반감은 여전히 갖고 있다”며 “프리미엄 진에 대한 구매는 그 도덕성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심리적 만족감을 가져다주는 한계점에 해당된다”고 분석했다.

글=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사진=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청바지에 면 티 입으면 제격”…세계적 패션디자이너 아르마니 예찬▼

한 패션쇼에서 청바지를 입고 무대에 오른 패션디자이너 조르지오 아르마니. 동아일보 자료 사진

4월에 방한했던 패션 디자이너 조르지오 아르마니(71)는 “당신이 추구하는 패션 철학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인간이 옷에 속박돼서는 안 된다. 옷 안에서 몸이 편안히 움직이고 그 옷을 통해 인체가 더욱 자연스러워 보여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잘 어울리는 청바지에 하얀색 면 티셔츠를 입은 모습이 가장 아름답다.”

청바지와 같은 의미로 알려진 ‘진(jean)’은 이탈리아의 항구도시 제노아에서 생산된 마차의 덮개용인 허드레 직물. 갈색이 대부분이었던 이 진이 너무 뻣뻣해 불편하자 1860년대 레비스트로스가 ‘데님(denim)’이란 직물로 청색 바지를 만든 게 현대 청바지의 원형이다.

1950년대 말런 브랜도와 제임스 딘이 영화 속에서 입고 나오면서 ‘젊음과 반항의 상징’이 된 청바지는 당시엔 남성만의 옷이었다. 그러나 1960년대 미국의 페미니즘 열풍과 함께 여성들이 ‘유니섹스’ 코드를 외치며 청바지를 입었다.

한국에 청바지가 들어온 것은 1950년대. “괴상하고 예의에 어긋난다” “개화한 사람들이 입는다”는 상반된 평가를 받았던 청바지는 1970년대까지도 ‘거리의 불량배’와 ‘통기타를 든 대학생’의 엇갈린 이미지를 동시에 갖고 있었다.

1980년대는 한국의 청바지 역사에서 획을 긋는 시기. 1982년 교복자율화 조치로 중고교생들이 몰리면서 청바지는 10대 패션의 상징이 됐다. 1990년대 ‘1524’ 세대들에게 ‘리바이스’ ‘닉스’ ‘캘빈 클라인’ 등 유명 브랜드 청바지는 또래 패션의 필수 아이템이 됐다.

한국의 중년 남자들이 가세한 ‘프리미엄 진’ 바람은 미국에서 먼저 시작됐다. 미국의 뉴욕과 할리우드 스타들의 프리미엄 진 패션이 인터넷 등을 통해 확산되기 시작한 것이다.

‘귀네스 팰트로 진’이란 수식어가 붙었던 ‘블루 컬트’나 브리트니 스피어스가 남자 친구와 커플룩으로 입었던 ‘세븐진’ 등은 이미 유명 브랜드가 됐다. 미국 드라마 ‘프렌즈’의 제니퍼 애니스톤, ‘앨리 맥빌’의 칼리스타 플록하트가 입었던 ‘디젤’ ‘얼진’ 등도 국내 시장에서 확산되는 추세다.

한국에서는 탤런트 김남주가 입었던 세븐진의 한 제품인 ‘뉴욕다크 진’이나 지난해 SBS 드라마 ‘봄날’에서 조인성이 입고 나왔던 ‘트루 릴리전’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최근엔 큰 포켓과 화려한 자수가 포인트인 ‘앤틱 데님’이나 세븐진의 디자인 멤버 일부가 독립해 만든 ‘시티즌 오브 휴머니티’도 인기가 오르고 있다.

신세계백화점의 남성옷 구매 담당인 유상범(37) 과장은 “과거엔 미국에서 입다 버린 ‘구제 청바지’나 마구잡이로 찢은 청바지가 고가에 팔리는 웃지 못할 풍조도 있었다”며 “최근에는 브랜드에 집착하지 않고 자신에게 어울리는 옷을 선택하는 경향이 뚜렷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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