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권장도서 100권]<87>주역-작자 미상

  • 입력 2005년 7월 14일 03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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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周易)은 시(詩), 서(書)와 더불어 유교의 삼대 경전 중의 하나로 음양의 두 효(爻)가 여섯 번 겹쳐 만들어진 64개의 괘(卦)와 경문, 경문의 이해를 돕기 위한 십익(十翼)으로 이루어진 점서(占書)이다. 음양이라는 지극히 단순한 기호의 모임인 64괘도 그렇고 예언이 대부분 그러하듯이 알 듯 모를 듯 아리송한 경문도 호기심과 신비감을 자아내기 충분하다.

주역의 근원은 유래가 불분명한 점괘들이지만 주역이 불후의 고전 중의 하나가 된 것은 일반적인 역술서와 다르기 때문이다. 우선 들 수 있는 특징은 신탁과 같은 초월적 방법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주역의 신비는 마치 세계를 반영하고 있는 듯한 부호들의 형상과 수학적 배합에서 나온다.

태극기의 네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건곤감리(乾坤坎離) 4괘가 하늘과 땅, 물과 불을 상징하고 있는 주역의 중요 4괘라는 것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8괘의 하나하나가 세계를 이루는 중요한 요소를 상징하고 있으므로 이들이 합쳐짐으로 이루어지는 64괘의 형상과 변화는 세계의 모습과 변화를 보여준다 하겠다. 부호의 형상과 질서를 잘 해석하기만 하면 우주와 만물의 변화를 알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아직도 있는 걸 보면 주역이 보여주는 세계는 꽤 매력적인 모양이다.

사실 고대에는 점(占)이라는 게 오늘날 생각하듯이 과학과 대치되는 행위가 아니었다. 자연과 사회에 대한 과학적 인식이 부족했던 그때 나름대로의 세계관과 경험을 깔고 최대한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이루는 한 방법이었다.

사실 점 혹은 예언이라는 행위는 그 자체로 역설적인데 주역은 이 역설을 절묘하게 피해 간다. 미래를 알 수 있다는 것은 철학적으로 숙명론 내지 결정론을 전제하고 있다.

그렇지만 점에는 숙명론을 부정하는 요소 또한 동시에 존재한다. 점을 쳐서 알게 된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이 그것이다. 미래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라면 점을 쳐서 알게 된들 아무 소용없을 것이고 바뀔 수 있는 것이라면 점의 결과를 검증할 수 없을 것이니 이래저래 난감한 일이다.

또 하나의 문제는 점치는 행위 자체가 미래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오이디푸스 신화는 그것을 잘 보여준다.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결혼하게 될 것이다’라는 신탁을 받고 거기서 벗어나고자 애를 썼지만 결국 그 신탁은 실현된다.

만약 신탁이라는 예언 행위가 없었다면 그런 일이 없었을 텐데 말이다. 말도 안 되는 상상이지만 만약 그때 주역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상이다. 마음을 바르게 가지고 몸을 깨끗하게 해야 흉함에서 벗어나리라.’ 이런 괘가 나왔을지 모르겠다.

주역이 지닌 가장 큰 장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미래는 정해진 게 아니라 점을 치는 나의 마음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래서 좋은 괘나 나쁜 괘나 답은 한가지다. ‘성실하고 바르게 살아라.’ 지극히 상식적이나 진리가 아닌지. 여기서 주역은 역술서가 아닌 도덕과 인생을 생각하게 하는 철학책이 된다. 심심할 때 설명대로 괘를 한번 뽑아보면 삶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는 기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허남진 서울대 교수·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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