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세상을 등지고 사랑을 할 때’

  • 입력 2005년 5월 20일 16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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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등지고 사랑을 할 때/엘케 하이덴라이히 지음 한희진/옮김/280쪽·9000원·이레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엘케 하이덴라이히(62)는 방송과 친한 독일 여성 작가다. 오랫동안 라디오 드라마를 썼으며 1976년부터는 라디오 방송극 ‘반네 아이켈’에 정육점 부인역으로 나와 루르 사투리로 명사들을 거침없이 풍자했다. 이 방송극은 9년간 4500편이나 방송될 만큼 인기를 끌었다. 하이덴라이히는 이 인기에 힘입어 1984년 로스앤젤레스와 1988년 서울올림픽을 현장 리포트했다.

그는 1992년 단편집 ‘사랑의 식민지’를 펴내 소설가로서 첫발을 뗐고 2000년 이 단편집 ‘세상을 등지고 사랑을 할 때’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다.

제목은 프랑스 작가 로맹 가리의 말 “사랑을 나누는 이들의 행복은 늘 세상을 등지고 있다”는 데서 따 온 것. 타이틀 작품과 잘 들어맞는 말이다.

연인과 사랑을 나누는 일의 비밀을 하루빨리 알고 싶은 스무 살의 프랑카는 긴 기다림과 부단한 탐사 끝에 어느 날 서른다섯 살의 군인 하인리히를 만난다. 그와 함께 호숫가의 빈 별장으로 밀월여행을 떠난 동안 세상에선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 헤어진 두 사람이 스물일곱 해가 지난 다음 재회의 기쁨을 나눌 때는 또 세상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가.

나이 들어 ‘프란치스카’라는 정식 이름으로 불리게 된 프랑카가 아르마니 옷차림의 중년 부인이 되어 초로의 옛 애인을 만나러 가는 장면은 문득 미국 소설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를 떠올리게 한다. 매디슨 카운티의 여주인공 ‘프란체스카’ 존슨이 사진작가 로버트 킨케이드를 다시 만나러 갔다면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타이틀 작품을 포함해 모두 7편의 소설들은 ‘지나간 사랑과 청춘의 아름다움을 회상하는 초원의 산책’을 떠올리게 한다. 열일곱 살에 만난 첫사랑을 반추하는 ‘소시지와 사랑’,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비로소 그녀의 삶에서 가장 깊이 숨겨졌던 비밀을 알게 되어 숨진 어머니와 화해하게 되는 딸의 이야기 ‘생애 가장 아름다웠던’, 중년이 된 독일 68세대의 잠들지 않는 꿈에 대한 이야기 ‘보리스 베커가 은퇴하던 날’이 특히 그렇다. 쉽게 읽히면서도 짜임새가 탄탄하다.

권기태 기자 k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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