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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4년 4월 11일 17시 3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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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왕자의 가슴을 칼로 찌르지 못하고 물거품이 돼 사라져버리는 인어공주 때문에 가슴 아팠던 기억을 어른들은 많이 갖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미국의 디즈니사는 아예 인어공주와 왕자의 결혼이라는 해피엔딩으로 이야기를 바꿔 버렸다. 안데르센이 다시 태어나더라도 디즈니사의 ‘버전’을 재미있게 볼 것 같다.
아이가 아예 작품을 쓴다면? 친구들과 상상놀이를 하면서 이야기를 잘 꾸미는 아이라도 글로 표현하라고 하면 망설이게 마련이다. 더구나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 되면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어휘력 문장력 논리력은 날로 늘지만 어디서부터 글쓰기를 시작해야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그러나 박완서 이문열 황석영이 작품의 앞쪽을 써 준다면? 디즈니사처럼 무단으로 뒤쪽을 바꾸지 않고 아이들이 작품을 완성하도록 뒷부분을 남겨둔다. 생각하기만 해도 즐거운 이 실험의 프랑스판 결과물이 이 책에 담겨있다. 프랑스의 대표적 문예지 주 부퀸과 일간지 르몽드가 함께 여는 문예콩쿠르의 당선작들이다. 올해로 19년째 열린 이 콩쿠르는 기성 작가가 글의 첫머리를 제시하면 9∼15세 아이들이 ‘혼자’ 혹은 ‘친구들과 함께’ 뒤를 이어 글을 쓰도록 돼 있다.
‘까모’ 시리즈로 유명한 작가 다니엘 페낙은 ‘이름을 잃어버린 소년’ 이야기를 꺼낸다. 이번에도 주인공 까모의 새 학년 첫 수업 시간이 배경이다. 수학선생님은 올해 집합을 배울 거라며 집합이 우리 생활에 얼마나 유용한지 설명한다. 새로 맡은 아이들의 이름을 외우기 위해 선생님은 아이들을 갈색머리 집합, 곱슬머리 집합, 키가 큰 집합, 키가 작은 집합으로 무리지어 외운단다.
그러나 해마다 부딪히는 문제가 있는데 바로 ‘어떤 집합에도 넣을 수 없는’ 외톨이가 생긴다는 것. 아이들이 웃음을 터뜨리고 한 아이는 ‘올해 누가 그렇게 될 것 같으냐’고 질문한다. 선생님은 “바로 너”라며 이름을 되묻는데 아이는 머뭇거리다 ‘이름을 까먹었다’며 울먹인다. 이 상황이 다니엘 페낙이 아이들에게 던진 소설의 ‘화두’다.
당선작을 살펴보자. 레티샤 랑드르(13)는 집합을 잘 이용해 그 아이가 누구인지 밝히는 까모의 활약상을 소설로 풀어냈다.
단체로 응모해 당선된 조제프 쇼미에 콜레주 1학년생(한국의 초등학교 6년생에 해당)들은 까모의 반 아이들이 선생님에게 반항하는 모습을 그렸다. 선생님이 사람을 집합으로 묶는 것 자체가 전체주의적이고 차별적이라는 설명이다.
모로코 출신의 작가 타르 벤 젤룬은 ‘마지막 한마디는 누구의 몫일까?’에서 위기에 빠진 청각장애인 가족 이야기를 제시했다.
이 이야기는 세 개의 당선작을 냈다. 타지오 레트로틸로(11)와 살림 코르피(11)는 코믹하게 이야기를 전개했고 세비녜 콜라주 1학년생들은 청각장애인 가족이 정면 승부를 통해 위기를 극복하는 이야기로 만들었다.
유럽 최고의 지성으로 꼽히는 작가 미셸 투르니에는 ‘방드르디의 모험’에서 자신의 대표작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에 이어지는 뒷이야기를 요구한다.
줄리앙 듀링크(11)는 결국 방드르디가 로빈슨을 찾아오는 이야기로, 마르셀 파뇰 콜레주 1학년생들은 방드르디가 미국의 인디언들과 함께 사는 이야기로 화답했다.
아이들에게 말을 걸어보자. 예상하지 못한 걸작이 쏟아질지 모른다. 아이들은 본래 타고난 이야기꾼이지 않은가.
김진경기자 kjk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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