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賞을 받은 한국인들]<12·끝>이정식 교수

  • 입력 2004년 3월 28일 19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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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식 펜실베이니아대 명예교수는 2003년부터 2년째 경희대 NGO대학원 객원교수로 국내에서도 강의하고 있다. 그는 최근 여운형에 대한 책을 집필 중이라고 밝혔다.      -김미옥기자
이정식 펜실베이니아대 명예교수는 2003년부터 2년째 경희대 NGO대학원 객원교수로 국내에서도 강의하고 있다. 그는 최근 여운형에 대한 책을 집필 중이라고 밝혔다. -김미옥기자
《한국의 공산주의 운동에 관한 통사(通史)는 국내외를 통틀어 하나뿐이다. 로버트 스칼라피노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석좌교수(85)와 이정식(李廷植·63) 펜실베이니아대 명예교수가 공저한 ‘한국공산주의운동사(Communism in Korea)’가 그것이다.

이 책은 1910년대 한국공산주의 태동기부터 1972년 7·4 남북회담 때까지 한국 공산주의의 역사와 조직을 총괄한 기념비적 저서다. 워낙 방대한 내용이라 전체 2권 중 국내에 번역된 것은 1권에 불과하다.

이 책은 1974년 미국정치학회가 그 전년도에 출간된 정치 및 국제문제 분야 저술 중 최고 저작에 수여하는 우드로 윌슨 파운데이션 상을 수상했다.

‘핵무기와 외교정책’을 쓴 헨리 키신저,‘독재의 사회적 기원과 민주주의’를 쓴 베링턴 무어 등 쟁쟁한 석학과 나란히 이 상의 수상자 반열에 오른 것이다.

한국인은 물론 아시아인으로 유일무이하다.》

이 교수를 ‘복 받은’ 미국 이민자로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러나 이 교수는 어린 시절 만주에서 광복을 맞은 뒤 3년간 국공 내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남아 한국으로 돌아왔으나 다시 공산치하의 북한과 6·25전쟁에서 죽을 고비를 숱하게 넘기며 어렵사리 앞길을 개척한 사람이다.

전쟁 직후인 1954년 1월 미군 군용기를 타고 미국 유학을 떠날 당시 그의 나이 23세. 그때 그는 일본군 국부군 홍군 소련군 북한군 한국군 그리고 미군 사이에서 산전수전을 겪으며 중국어와 일본어, 영어를 터득한 상황이었다. 최악의 여건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항상 주어진 현실에서 최선을 다한 결과였다.

“그런 혼란 속에서 살아남아 제가 미국에서 공부를 하게 됐다는 사실 자체가 기적이죠. 저는 불우한 환경에 있었지만 늘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기에 죽은 사람들 몫까지 최선을 다했죠.”

접시닦이와 할리우드 단역배우 생활을 하며 생활비를 벌어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에서 정치학 석사과정을 마친 그는 1957년 스칼라피노 교수에게서 한국공산주의에 대한 공동연구 제의를 받고 버클리대로 옮긴다. 스칼라피노 교수는 당시 30대 후반이었지만 하버드대 박사학위 논문 ‘메이지시대 일본 민주주의의 좌절’ 한 편으로 이미 미국 정치학계의 신성으로 떠올라 있었다.

“그가 저를 만나려고 로스앤젤레스로 찾아왔을 때만 해도 저는 그의 위상을 제대로 몰랐어요. 그의 초청으로 버클리대 세미나에 참석했다가 학생들의 열광적 반응을 보고 깜짝 놀랐죠.”

스칼라피노 교수는 당시 일본과 중국, 한국 공산주의에 대한 연구를 검토하고 있었는데 일본어 중국어에 모두 유창한 데다 만주와 북한에서 생활한 이정식의 이력을 눈여겨보고 자신의 제자로 발탁했던 것이다. 그는 그때부터 스칼라피노 교수가 입수한 일본과 중국, 북한의 자료를 통해 한국 민족주의운동과 공산주의운동에 대한 논문자료를 정리한다. 그가 안창호나 여운형의 이름을 알게 된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1959년 여름 그는 대륙을 횡단해 워싱턴 국회도서관을 찾는다. 남의 차를 얻어 타고 워싱턴에 도착해 하루 숙박비 1달러짜리 빈민 숙소에서 눈을 붙여 가며 미국 정부가 그해 처음 비밀해제한 일본 정부 문서에서 한국 관련 자료들을 찾아 나섰다. 찜통더위 속에서 국회도서관으로 출퇴근하며 타자기를 들고 현장에서 일본어를 영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몇 주 동안 계속했다. 그러면서 그는 ‘독립신문’ 전질 등의 자료를 수집해 마이크로필름에 담는 작업도 병행했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이자 첫 저작인 ‘한국의 민족주의 운동사’(1961년)은 그렇게 탄생했다. 그러나 이 논문은 한국의 독립운동사연구와 전혀 별개의 풍토에서 독자적으로 싹튼 성과였기에 그 가치와 함께 한계도 있었다.

그 반면 ‘한국공산주의운동사’는 한국은 물론 북한의 연구물까지 포괄해야 했기에 더욱 지난한 작업이었다. 이 교수는 수십 차례 한국을 찾아 연구 성과를 점검했고 서울의 고서점을 뒤지다 광복 직후 조선공산당이 발행한 기관지 ‘해방일보’ 전질을 발굴하는 개가를 올리기도 했다. 스칼라피노 교수도 일본 중국 러시아에서 노동신문 등 북한자료를 계속 수집했다.

이 교수가 1961년 미국 동부의 펜실베이니아대 교수로 옮기면서 두 사람의 공동저작에 난관이 왔다. 하지만 두 연구자는 5000km의 거리를 서신 왕래로 극복했다. 편지로 서로의 집필 내용을 주고받으며 수정에 수정을 거듭한 것이다.

2권으로 계획된 ‘한국공산주의운동사’의 1권은 이 교수의 집필로 60년대 말 끝났다. 그러나 스칼라피노 교수가 베트남전 문제로 바빠지면서 2권 집필이 늦어졌다. 1972년에서야 모든 집필이 끝나 인쇄 단계에 들어갔을 때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됐다. 이 교수는 “한반도 분단 이후 가장 획기적 사건을 신간 서적에 담지 않을 수 없다”고 우겨 조판까지 끝난 인쇄 작업을 중단시킨 가운데 이 내용을 추가했다. 그 바람에 1000쪽이 넘는 이 책은 1973년에야 출간됐다. 1957년에 연구가 기획됐으니 16년 만에 결실을 본 셈이다.

“솔직히 나중에는 진이 다 빠져서 정작 책이 출간됐을 때는 쳐다보지도 않았어요. 그래서 미국정치학회에서 수상 통보를 받았을 때도 믿어지지가 않았죠. 아내는 혹시 스칼라피노 교수가 돌아가신 것 아니냐고 물었을 정도였습니다.”

이 교수는 이 모든 것이 ‘행운’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말하지만, 어떤 난관에도 굴하지 않는 낙천성과 생존력, 그리고 무엇이든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끈질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

▼“학구열에 반한 미군장교 미국유학의 기회 열어줘”▼

“열네 살 때 만주에서 광복을 맞았는데 그 이듬해 동포들의 귀국을 돕던 아버지가 외출하셨다가 실종됐어요. 4남 1녀의 장남이던 저는 졸지에 홀어머니까지 포함해 여섯 식구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습니다.”

‘소년 가장’ 이정식은 1946년 중학 과정을 마치는 둥 마는 둥 하고 랴오양(遼陽)면화공장의 청소원으로 취업했다. 하지만 총명한 머리와 부지런함으로 곧바로 최연소 사무원으로 발탁됐고, 주산과 중국어를 배우며 승진을 거듭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중공군이 만주지역을 장악하면서 48년 직장에서 쫓겨났다. 어쩔 수 없이 일가족을 이끌고 무작정 압록강을 건너 고국으로 향했다.

간신히 평양에 정착한 이정식은 34개월간 쌀장사를 하며 가족을 부양했다. 그러나 국영화가 가속화되고 6·25전쟁이 터지면서 생계는 더욱 어려워졌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여서 공산당이나 청년동맹에 가입하지 않고 버티던 그는 1950년 10월 9일 대동강변에서 평양을 점령한 국군에 섞여 있던 사촌형을 만나 일가족을 이끌고 다시 서울로 피란길을 떠난다.

한국에서 징병 대상이 된 이정식은 국민방위군 사관학교에 자원입대했으나 굶주림과 구타에 시달려야 했다. 1951년 국민방위군이 해체되면서 악몽 같은 생활에서 풀려난 그는 미 극동군 총사령부의 중국어 통역병으로 뽑힌다. 일본어와 중국어에 유창했던 그는 중국군 포로의 심문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뿐 아니다. 그는 미군과 함께 생활하게 된 것을 계기로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

“어려서 학업을 중단해야 했던 아쉬움으로 공부에 대한 열망이 컸습니다. 죽자 살자 영어단어를 암기하고 또 영어로 일기를 써서 매일 미군 병사의 검사를 받았습니다. 그런 제 모습에 감탄한 미군 장교들이 미국 유학의 기회를 제공해 줬죠.”

그는 “미국에 첫발을 디디고 보니 마치 흑백의 세계에서 컬러의 세계로 들어서는 것 같았다”고 소회했다. 만주 벌판에서 출발해 한반도를 가로지르고 미국 서부를 거쳐 동부 필라델피아에 정착한 노학자의 인생 역정은 그 학문 역정 만큼이나 파란만장했다.

●이정식 교수는

△1931년 평남 안주에서 태어나 세 살 때 만주로 이주

△1948년 북한으로 귀국, 평양에서 쌀장사

△1950년 서울로 피란, 국민방위군 사관학교 입학

△1954년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 정치학과 입학

△1957년 UCLA 석사과정 졸업, 스칼라피노 교수를 만나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박사 과정 입학

△1959년 스칼라피노 교수와 공저로 ‘한국공산주의의 기원’ 발표

△1960년 콜로라도대 전임강사

△1961년 다트머스대 교양강좌 전임강사

△1963년 펜실베이니아대 조교수, 박사학위 논문 ‘한국의 민족주의운동사’ 출간

△1973년 스칼라피노 교수와 공저로 ‘한국공산주의운동사’ 출간

△1983년 ‘만주에서의 혁명적 투쟁’ 출간

△1990년 제1회 위암 장지연상(학술) 수상

△1991년 펜실베이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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