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미도 생존자가 밝힌 ‘실미도의 진실’

  • 입력 2004년 1월 14일 15시 2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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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미도 초소 위에 모인 209파견대 기간요원들(왼쪽).실미도 부대 마크 앞에서 포즈를 취한 한 요원.
실미도 초소 위에 모인 209파견대 기간요원들(왼쪽).실미도 부대 마크 앞에서 포즈를 취한 한 요원.
“실미도 대원들 죽이라는 지시 없었다”영화 ‘실미도’에서 실미도 부대는 1968년 4월 창설됐다고 해서 684부대로 불렸다고 했으나, 이 부대의 정식 명칭은 2325부대 209파견대였다. 이런 식으로 영화 ‘실미도’와 현실 실미도 사이에는 괴리가 있다. 영화를 보면 공작원들이 고무보트를 타고 북한으로 들어가려다 상부 지시에 의해 강제로 돌아오는 장면이 있는데, 이용수씨는 “서해는 조류가 빨라 고무보트로 가면 사나흘이 걸려도 황해도 해안에 도착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실미도 사건이 일어날 때 209파견대에 있던 기간요원 수는 24명이었고 그중 6명이 살아남았다. 영화는 남북적십자회담 등으로 인해 쓸모가 없어졌기 때문에 상부에서 공작원을 죽이라는 지시가 내려왔고. 이를 공작원들이 알아차리고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생존자 중 한 명인 한모씨는 “당시 하사 계급이었던 나는 상부에서 내려오는 무전을 볼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그러나 내가 아는 한 그들을 죽이라는 지시는 없었던 것으로 안다. 그들을 죽여야 할 이유도 없을 뿐 아니라 그들을 죽이려 했다면 우리가 그렇게 무방비로 당하지도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씨는 “사건이 나던 날 기간요원과 공작원의 수는 정확히 24대 24였다. 사건은 월요일 발생했는데, 월요일은 주말 외출 외박을 나갔던 요원들이 풍랑 등으로 귀대하지 못할 수 있어 가장 요원 수가 적은 날이었다. 209파견대에서는 잘못을 범한 공작원들을 상당히 잔인한 방법으로 처벌했다. 특히 기간요원에게 덤빈 공작원은 가혹한 처벌을 받고 숨진 적도 있는데 이런 것이 원인이 돼 공작원소대 소대장들의 주도로 기간요원이 가장 적은 월요일 폭동을 일으킨 것으로 안다”라고 말했다.

실미도 사건과 관련해 가장 궁금한 것은 버스를 탈취한 공작원들이 달려가고자 한 목적지가 어디인가 하는 점이다. 이들은 오류동에 있는 2325부대에 와서 공수훈련을 받았으므로 2325부대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이들이 서울로 달려가는 연도에 2325부대가 있었으나 지나쳤다. 또 공군본부로 꺾어지는 대방동 길도 지나쳐 노량진까지 갔다가 노량진경찰서가 쳐놓은 방어망에 걸려들었다. 이때 한 명의 공작원이 수류탄을 던지려고 안전핀을 뽑자 경찰관이 정확히 그를 저격했다. 그로 인해 안전핀을 뽑은 수류탄이 폭발함으로써 공작원들은 죽거나 중상으로 체포됐다. ‘붉은기’ 노래를 부르는 장엄한 장면은 없었던 것이다. 공작원들은 과연 청와대로 가려고 했던 것일까. 일부 관계자들은 “공작원들은 분노와 흥분 속에무작정 달려갔던 것이 아니겠느냐”는 의견을 내놓았다. 실미도 사건과 관련해 한씨는 이런 지적을 했다.

“영화에서는 사형수와 무기수 중에서 공작원을 뽑은 것으로 돼 있는데 내가 아는 한 사형수는 없었고 무기수가 한 명 있었다. 나머지는 돈놀이 등 작은 죄를 저지르고 교도소에 있다가 온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가장 연장자는 40세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들은 북한으로 간다는 사실도 모르고 실미도에 온 경우가 많았다. 영화를 본 사람 중에는 공작원들에게 연민을 품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그러나 피해는 우리 기간요원들도 똑같이 입었다. 사건 당시 사망한 18명의 기간요원 중에서 보상받은 유가족은 없다. 나 또한 정신적으로 큰 쇼크를 입었지만 약간의 치료만 받고 군대를 떠났을 뿐이다. 이제 오랜 세월이 지난 만큼 당시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조그만 보상이라도 해주었으면 좋겠다.”

이정훈 주간동아 기자 h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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