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동화 당선작/그림자 각시와 매화무늬 표범

  • 입력 2003년 12월 31일 16시 3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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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윤정주
그림 윤정주
<1>

느티나무 위에서 졸던 매화무늬 표범이 앞다리를 쭉 펴고 기지개를 켰습니다. 이 게으른 표범은 배가 고팠으므로 더 이상 잠을 잘 수 없었습니다.

“아, 잘 잤다! 이제 슬슬 사냥이나 해볼까.”

표범은 나무에서 내려오다 그만 미끄러져 구르고 말았습니다.

“어이쿠!”

누가 볼까 얼른 일어났지만 표범 체면이 말이 아닙니다. 이제는 너무 늙어 두더지 잡는 것도 힘에 겨웠습니다. 그리고 이빨이 빠져서 질긴 음식은 잘 먹지도 못한답니다.

표범의 코끝으로 아기 노루의 맛있는 냄새가 스쳐갔습니다. 바람이 노루들 쪽에서 불어와 다행입니다. 그래야 노루들에게 다가가도 표범의 고약한 냄새를 들키지 않을 테니까요.

언덕 너머에서 아기 노루 사형제가 한바탕 뜀뛰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높이 뛰기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아!”

덩치가 제일 큰 첫째 ‘새털구름’은 앞발을 치켜들고 으스댔습니다.

“나는 바람보다 더 빨리 달릴 수 있어!”

“나는 시냇물을 단번에 뛰어 건널 수 있어!”

다리가 긴 둘째 ‘풀잎바람’과 귀가 아주 큰 셋째 ‘소리사냥’이 차례로 달려가며 소리쳤습니다.

“나는…… 나는…….”

하지만 가장 작은 막내는 더듬거리다 공연히 눈물만 났습니다.

“내가 말해주지! 너는 늘 옹달샘처럼 눈물을 흘리니까 울보대장이야!”

“막내는 그림자하고 노는 것밖에 몰라. 어서 가서 그림자 각시나 하렴! 하하하!”

오빠들의 웃음보에 막내는 더욱 슬퍼졌습니다.

막내 노루는 아기 시절에 엄마 젖을 잘 먹지 못했답니다. 몸이 약하게 태어났기 때문에 아픈 날이 더 많았고 키도 잘 자라지 않았습니다.

엄마, 아빠 노루가 걱정스럽게 말했습니다.

“얘들아! 늑대와 표범을 조심해라!”

“멀리 가면 안 된다! 막내를 잘 돌봐야 해!”

“예!”

그러나 오빠들은 자기들끼리 노느라 금세 막내를 잊어버리고 맙니다.

“넌 그림자하고나 놀아!”

머뭇거리는 사이에 오빠들은 풀밭으로 달려가 버렸습니다.

“오빠! 같이 가!”

막내가 불렀지만 돌아온 것은 쌀쌀맞은 핀잔뿐입니다. 그래서 막내는 오늘도 혼자 남아 자기 그림자하고 놀아야 할 신세입니다. 오빠들은 이런 막내를 ‘그림자 각시’라고 불렀답니다.

<2>

노루 형제들은 언덕까지 달려왔습니다. 매화무늬 표범이 숨어서 군침을 흘리며 지켜보는 것도 모르고 말입니다.

첫째 ‘새털구름’은 껑충 뛰어올라 언덕 너머를 살피고는 으스댔습니다.

“난 세상 끝까지 보았어! 언덕 너머에 맛있는 사과가 있어!”

노루 형제들은 맛있는 사과 생각에 침을 흘리며 풀밭을 가로질러 뛰어갔습니다. 어느 사과나무 위에서 노래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노루야! 노루야! 바람처럼 높이 뛰어 이 사과를 먹어보렴.”

아기노루 형제는 깜짝 놀라 노래하는 나무 앞에 멈추어 섰습니다.

“나는 조랑말보다 더 높이 뛴단 말이야.”

첫째 ‘새털구름’은 사과를 향해 뛰어 올랐습니다.

“거의 딸 뻔했어. 다음엔 먹고 말 거야!”

둘째 ‘풀잎바람’도 셋째 ‘소리사냥’도 멋지게 뛰었지만 사과에 닿지 못해 실망하여 돌아갔습니다.

표범은 사과나무 가지 끝으로 몸을 움직였습니다. 그러자 가지가 무거워져 땅 가까이 내려가게 되었지요.

이제 노루 형제들이 맛있는 사과를 따먹으러 올 것이고, 그러면 위에서 덮치면 되는 겁니다. 표범은 연한 새끼 노루를 맛볼 생각에 힘든 것도 참고 기다렸습니다.

“저것 봐! 가지가 내려와 있어!”

노루 형제들은 표범이 잎사귀 뒤에 몸을 숨긴 것도 모른 채 달려왔습니다.

막내 ‘그림자 각시’는 혼자서 그림자놀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자기 그림자를 밟으려하면 그림자가 한 발 앞서 도망쳤습니다. 이렇게 사과나무 아래에 온 막내는 깜짝 놀라 멈추었습니다.

이상한 동물의 그림자가 땅 위에 어른거리고 있었습니다. 고개를 들어보니 잎사귀 사이로 숨은 표범의 꼬리가 보였습니다. 막내는 소리를 질렀습니다.

“표범이다! 표범이 나무 위에 있다!”

노루 형제들은 놀라서 도망쳤습니다. 막내가 아니었다면 잡혀 먹힐 뻔했던 것입니다.

“정말 고마워! 이제부턴 너를 놀리지 않겠어.”

“너를 괴롭히는 애들을 혼내주겠어!”

“너는 참 눈이 밝구나. 막내야!”

오빠들은 막내와 사이좋게 지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표범의 사냥은 더욱 어렵게 되었습니다.

<3>

언덕 위로 보름달이 두둥실 떠올랐습니다. 대장 노루는 다른 노루들을 거느리고 달구경을 나섰습니다.

“저 달은 정말 아름답군!”

이때 옆에 있는 박달나무 위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저 달은 기막히게 맛있지.”

“정말 달을 먹을 수 있나요?”

대장 노루가 솔깃해서 물었습니다.

“정말이고말고. 뿐만 아니라 먹어서 작아지면 보름 후에 새 살이 자란단 말이야.”

이 말이 거짓인 줄 모르는 대장 노루는 감탄하였습니다. 나무 위 목소리는 한 술 더 떠서 말했습니다.

“내가 바로 저 달의 주인이야.”

이 엉큼한 거짓말쟁이는 바로 매화무늬 표범이었어요. 대장 노루가 욕심쟁이란 것을 알고 꾀를 낸 것입니다. 표범은 대장 노루가 쉽게 속아 넘어가자 신이 나서 더욱 떠벌렸습니다.

“저 달을 먹으면 평생 죽지도 않고 병에 걸리지도 않아. 내가 이렇게 높은 나무에 오를 수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야.”

달을 먹어보고 싶은 마음에 대장 노루가 침을 꿀꺽 삼켰습니다.

“넌 대장인데도 겨우 풀이나 먹으며 사니 억울하지 않아? 내 소원을 들어주면 저 달을 몽땅이라도 주지.”

“당신 소원이 뭐죠?”

대장 노루가 기뻐하며 물었습니다.

“이틀마다 새끼노루 한 마리씩을 내게 바치면 돼.”

귀여운 새끼들을 먹이로 바쳐야 한다는 말에 대장 노루는 망설였습니다. 그러나 달을 먹어보고 싶은 욕심이 부풀어 올랐습니다. 달을 곁에 두고 먹을 수 있다면 평생 먹을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대장이니까 당연히 편하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죠.

“좋아!”

주위에 있던 노루들이 놀라서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약속은 이미 정해져버렸습니다.

<4>

대장 노루는 가장 몸이 약한 ‘그림자 각시’를 달과 바꾸기로 했습니다. ‘그림자 각시’ 같은 연약한 노루 하나가 없어진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림자 각시’네 가족은 이 사실을 전해 듣고 몹시 슬퍼했습니다. 무섭고 슬프기는 아이들이 있는 다른 노루 가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틀마다 하나씩 죽으러 가야만 합니다.

‘그림자 각시’의 엄마, 아빠는 달님이 뜨지 않기만을 바랐습니다. 그러면 막내가 안 잡혀가도 되었으니까요. 그러나 야속하게도 저녁이 되자 달님은 환한 얼굴을 내밀고야 말았습니다.

막내 ‘그림자 각시’는 대장 노루를 따라 연못으로 갔습니다.

“꼬르륵! 꼬륵!”

배고픈 매화무늬 늙은 표범의 배에서 나는 소리입니다. 표범은 이미 와서 버드나무 위에 몸을 감추고 있었습니다.

“저기 연못에 달을 뱉어 놓았어.”

정말 밝은 달이 잔잔한 연못에 떠 있었습니다. 대장 노루는 연못으로 달려가 물에 떠있는 달을 마셨습니다. 달을 먹는다는 생각에 달콤하게만 느껴졌습니다.

“정말 굉장한 맛이야! 이런 맛일 줄은 몰랐어. 게다가 배까지 부르군.”

“그럼 이젠 새끼 노루를 넘겨 줄 차례야.”

대장 노루는 막내 ‘그림자 각시’의 등을 떠밀어 표범에게 보내려고 했습니다.

“잠깐! 먼저 제 말을 들어보세요.”

‘그림자 각시’가 다급하게 소리쳤습니다.

“달을 연못에 띄웠으니, 저를 줄 때도 연못에 띄워야 공평해요.”

‘그림자 각시’는 매일 그림자와 놀았던 덕분에 연못의 달도 그림자란 것을 알았던 것이죠. 대장 노루가 듣고 보니 옳은 말입니다. 표범도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림자 각시’가 연못 가까이 다가서자 어린 노루의 얼굴이 물위에 비쳤습니다. 표범은 하는 수 없이 허기진 배에 물만 가득 채우고 돌아가야 했습니다.

대장 노루는 어린 ‘그림자 각시’ 덕분에 속지 않아 무척 기뻐했습니다.

“작지만 참으로 현명하구나! 앞으로 그림자처럼 내 곁을 떠나지 말고 도와다오.”

“예, 알겠어요. 대장님!”

이제는 예전의 막내 ‘그림자 각시’가 아니었습니다. 노루들은 이제 막내를 표범을 물리친 ‘지혜로운 그림자’라고 불렀습니다.

몸이 작다고 마음까지 작은 것은 결코 아니랍니다. 노루들 사이에서 막내는 그 누구보다도 늠름해 보였습니다.

△1964년 충남 부여 출생△1986년 육군사관학교 졸업 △현재 국군방송 집필위원

▼당선소감-조준호▼

당선 연락을 받던 날 저녁 딸아이의 유치원 재롱잔치를 보러 갔었다. 어린이들의 공연은 늘 틀리고 어설퍼도 예쁘고 자연스럽게만 보였다. 꾸밈없이 무아지경에 몰입하는 아이들의 천성이 바로 아름다움이라고 느끼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이 천사들의 이야기 쓰기를 너무 쉽게 여겨왔던 것은 아닌지 반성해본 시간이기도 했다.

부족한 저를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그리고 고생이 많았을 여러 응모자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한다.

여러 분야의 문학창작을 칠년 넘게 넘나들다 동화에서 하나가 맞았다. 현역 프로듀서 한분은 내 습작 드라마를 읽고 ‘유치’하다는 평가를 해주었는데 여기서 모욕감과 함께 힌트를 배웠던 것 같다.

아동문학 부문 응모작을 심사 중인 이준관(왼쪽) 강정규씨.

사람의 단점은 바로 장점이거나 최소한 바꿔버릴 수 있다는 역설도 배웠다. 어떻게 나 같은 사람이 글을 쓰게 됐느냐고 묻는 분도 많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숙명과 의지가 반반이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가족들이 져야 했던 고통과 근심을 약간은 덜어드린 것 같아 무척 기쁘다. 동화쓰기의 동기이자 밑천이었던 두 딸아이에 대해서도, 작은 성과에도 환호를 잊지 않았던 친구들에게도 특별한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불혹의 나이에 작가의 길에 들어섰다는 박완서 선생은 내게 가능성과 희망을 일깨워주곤 했었다. 미래의 나 역시 누군가에게 힘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약속을 새해에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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