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이만교/덜컹거려도 앞으로 가자

  • 입력 2003년 12월 28일 18시 0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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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무척이나 다사다난했다. 미국의 이라크 침략, 북한 핵 논쟁, 수많은 자살, 차떼기 정치와 특검 등 비유하자면 우리나라는 쉴 새 없이 덜컹거린 버스와도 같았다.

정말 재미있는 점은 버스가 덜컹거린다고 모든 승객이 화를 내진 않는다는 사실이다. 어떤 사람은 ‘야, 재밌다’ 하고 박수친다. 어떤 사람은 ‘기사 아저씨야말로 고생 많으시다’며 걱정해줄 줄도 안다. 어떤 이는 자신이 기사인 양 전방을 바라보며 잔뜩 긴장하기도 하고, 허리를 다쳤다고 트집 잡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또는 내내 잠만 자는 사람도 있다.

▼2003 대중문화 ‘미래 탐색중’▼

이 때문에 대통령을 비롯한 다방면의 ‘기사 아저씨’들에겐 매우 힘든 한 해였을 것이다. 하지만 대중문화를 즐기는 일반 승객들은 제각각 나름대로 풍요로운 문화를 즐기며 놀았다. 각종 출판물, 영화, 드라마, 모바일 콘텐츠가 명멸했다. 나 역시 신간 서적, 개봉 영화, 인터넷 검색에 즐겁게 정신을 뺏겼다. 그런데 워낙 다양한 내용이 명멸해서 이제금 돌아보면 뒤죽박죽, 마치 꿈속에서 벌어진 한바탕 몽환 같기만 하다.

기실 대중문화는 ‘일종의 꿈’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정신분석학자들의 지적처럼, 사회제도가 개인의 의식 활동이라면 대중문화는 무의식적 욕망에 비견할 만하다. 대중은 검열과 위장, 상징과 착종(錯綜), 모순과 상생이 한데 뒤섞인 불균질한 형태로 자신들의 무의식적 욕망을 대중문화 속에 만개시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중문화는 그 자체가 현실일 수도 있고, ‘억압된 것들의 귀환’일 수도 있고, 아니면 단지 뒤틀린 상징일 수도 있다. 언제나 잠정적이며 유동적인 것이다. 그 대신 의식화되고 경직된 제도들보다 한결 빠르고 정직하게 시대를 예감할 줄 안다.

올해의 가장 특이한 열풍 중의 하나는 단연 누드집 출간과 ‘얼짱’과 ‘몸짱’, 그리고 이효리 열풍 등으로 표현되는 육체의 반란이었다. 이것들은 상업적 시스템에 의해 형성된 것이지만, 그전에도 상업적 시스템은 있었다는 점에서 분명히 특기할 만한 징후다.

모든 문화는 그 발생 초기에 있어 새로운 재력가들의 도움을 받아 발흥한다. 신흥 시민계급의 지지를 받은 근대소설이나 사진, 중인계급의 지지 속에 성장한 사설시조나 판소리가 그러한 사례다. 누드집이나 얼짱 몸짱에 대한 열풍도 마찬가지인데, 인터넷과 모바일이라고 하는 새로운 매체와 기업의 전략 없이는 불가능한 현상이었다.

반면에 안방을 겨냥한 TV드라마에서는 사극 아니면 눈물 빼는 드라마가 상한가를 누렸다. 특히 순정적인 주인공이 가족을 완성하지 못하고 죽어버리는 내용이 수차례 반복되고 있다. ‘바람난 가족’이나 ‘싱글즈’ 같은 가족 해체와 개인주의를 직시했던 영화와는 대조를 이룬다.

그러고 보면 감각적 누드집을 내세운 모바일, 가족 해체 현상을 직시한 영화, 그리고 가족적이고도 순정적인 여주인공들의 죽음을 다룬 TV드라마가 각각 문화의 층위를 이루며 펼쳐졌다는 사실이야말로 실로 특기할 만한 2003년의 문화현상이다. 한국 사회는 바로 이런 식으로 과거의 가치와 작별을 고하는 중이고, 다가올 미래를 탐색 중인 듯싶다.

▼단절-이기주의 발묶여선 안돼 ▼

순정적인 여주인공들이 TV드라마마다 속절없이 죽어 나가며 대중에게 이별을 고하는 반면, 자기 육체를 감각적으로든 상업적으로든 활용할 줄 아는 여성들이 모바일을 통해 등극하는 형국인 것이다. 모바일이나 인터넷은 아직 혼잡하고 자극적이지만 결국 새로운 가치와 미학을 실현할 미래지향적인 매체인 것만은 분명하다. 우리는 다만 아직은 그 중간에서 가부장제 및 권위주의의 해체와 개인주의의 시대, 그리고 다매체 시대를 맞아 목하 고민 중인 것이다.

분명한 것은 젊은 대중이 변화를 몹시 갈망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요구하는 개인주의가 단절과 이기주의에 발 묶이지 않고 합리적인 개인주의로 자리 잡아야 할 과제가 주어져 있기는 하다. 어쨌든 젊은이들의 이런 갈망은 미래지향적이라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이것이 내년에는 고착된 정치 및 경제구조에도 신선한 변화의 바람으로 작용했으면 하고 간절히 바라 마지않는다.

이만교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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