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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3년 11월 10일 18시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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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에 베인 그의 예술혼은 그 자체가 통증이다. 그의 예술은 삶의 벼랑 끝에서 토해내는 비명이며 스스로의 상처를 비벼대는 학대(虐待)다.
“나는 이글거리는 태양을 그릴 때 무시무시한 속도로 회전하는 에너지를 느끼게 해주고 싶어. 보리밭을 그릴 땐 보리알 하나하나가 영글어 터지는 최후의 순간을 보여주고 싶어. 사과를 그릴 땐 사과의 즙이 껍질을 밀고 터져 나오려는 것을, 사과씨들이 스스로의 결실을 맺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을 담고 싶어.”
고흐의 작품은 한 영혼의 소진(消盡)이자 정신의 고갈이었다.
27세가 되어서야 화가가 되기 위해 데생공부를 시작했던 고흐. 그는 미친 듯 붓을 놀리던 마지막 5년 동안을 정신착란과 발작증세에 몸부림치다 갔다. 그의 나이 37세. 고흐는 가장 더럽고 누추한 땅에 입맞춤하며 불후의 걸작들을 남겼다.
생전에 비평가들은 “고흐의 색채는 야만적”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팔리지 않는 그의 작품은 닭장의 문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는 이렇게 푸념했다. “내 그림이 안 팔리는 걸 어찌할 수가 없다. 그러나 언젠가는 내 그림이 물감 값이나 내 여윈 몸뚱어리의 품삯보다는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 날이 오겠지.”
생전에 팔린 그의 그림으로는 ‘붉은 포도나무들’이 유일했다.
그러나 고흐가 죽고 나자 작품들은 생활고에 찌들었던 그의 운명을 비웃기라도 하듯 세계 그림경매 사상 최고가를 잇따라 경신한다. ‘붓꽃’은 1987년 11월 소더비경매장에서 5390만달러(약 635억원)에 팔려 최고가를 기록했다. 앞서 팔린 ‘해바라기’도 기록(3990만달러)이었다. 그리고 3년 뒤 그의 그림 ‘의사 가셰의 초상’은 8250만달러(약 972억원)에 경매된다.
평생의 후견자였던 동생 테오에 안겨 숨진 고흐의 품에서는 쪽지가 발견됐다. ‘그래. 나의 그림. 그것을 위해 나는 나의 목숨을 걸었고 이성까지도 반쯤 파묻었다.’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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