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강정훈/조상이 물려준 방풍림의 교훈

  • 입력 2003년 9월 19일 18시 32분


“방풍림이 마을과 주민을 지켜 주는 수호신입니다.”

경남 남해군 삼동면 물건리 200여가구 500여 주민은 태풍 ‘매미’가 남부지방을 휩쓸고 지나간 요즘, 바다와 이 마을 사이에 병풍처럼 놓여 있는 울창한 숲을 바라볼 때마다 조상들의 슬기가 새삼 가슴에 와 닿는다.

해일 등 바닷물의 침범과 태풍을 막기 위해 400여년 전 조성된 대규모 인공조림 숲인 ‘물건방조어부림(勿巾防潮魚付林)’ 덕분에 이번 태풍 때 피해를 줄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전체 길이 1.5km, 너비 30∼40m인 이 숲은 팽나무와 상수리나무, 느티나무 등 1만여 그루로 조성돼 있다. 특히 큰 나무는 중심부에, 작은 나무는 그 양쪽에 간격까지 조절해 심는 등 바람의 저항을 덜 받도록 ‘설계’됐다. 조상들의 지혜가 돋보이는 부분이다.

물건리 이장 이철홍씨(33)는 “이번 태풍으로 선박과 어구 등은 크게 파손됐지만 주택과 농경지 피해는 거의 없었다”고 말했다. 지난해 태풍 ‘루사’와 87년 태풍 ‘셀마’ 때도 마찬가지였다.

남해군 금산 앞 상주해수욕장과 상주면 상주리 사이에도 수백 년 된 방풍림이 버티고 있다. 주민들은 “방풍림이 훼손되지 않도록 잘 보전했기 때문에 태풍의 직접적인 타격을 받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동안 방풍림이 훼손됐던 지역은 정반대의 결과를 낳았다. 10여년 전 방풍림을 베어내고 집을 지은 인근 상주면 금전마을은 이번 태풍에 피해가 컸다.

또 중소기업들이 입주하면서 30여년 전에 비해 방풍림이 크게 줄어든 거제시 연초면 한내리도 이번 태풍으로 주택 침수와 파손이 잇따랐다.

1994년 경남의 해안방풍림을 조사했던 경남도 송호룡 지적과장은 “태풍과 해일을 막아내는 데 방풍, 방조림 조성만큼 효과적인 방법은 없다”며 “그러나 정부의 무관심과 개발논리에 밀려 기존의 방풍림마저 훼손되고 있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마산시 해운동 일대는 상가와 아파트를 지을 욕심에 무분별하게 바다를 매립한 뒤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아 이번 태풍과 함께 온 해일로 많은 인명과 재산 피해를 보았다.

낙동강 유역의 상습적인 범람과 침수도 물 흐름을 왜곡시킨 하천 개발이 불러온 ‘재앙’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잇따른 산사태 역시 마구잡이로 야산을 깎아내린 인간의 손길이 주된 이유였다.

조상들이 선물한 숲마저 제대로 보전하지 못해 자연재해를 자초하고 있는 오늘날의 후손들을 조상들은 어떤 심정으로 지켜보고 있을까.

강정훈 사회1부기자 manm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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