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슈퍼모델]모델 도전? 일단 미쳐!

  • 입력 2003년 7월 10일 16시 2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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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필 촬영을 맡은 제작진들이 ‘개인기’를 주문하자 37번 최윤희양(19·경희대 한국무용 전공 1년)이 신나게 춤을 추어 보이고 있다. 슈퍼모델 후보들은 탭댄스 태권도 성대모사 등 다양한 장기를 통해 감춰진 ‘끼’를 보여줬다. 홍천=신석교기자 tjrry@donga.com

프로필 촬영을 맡은 제작진들이 ‘개인기’를 주문하자 37번 최윤희양(19·경희대 한국무용 전공 1년)이 신나게 춤을 추어 보이고 있다. 슈퍼모델 후보들은 탭댄스 태권도 성대모사 등 다양한 장기를 통해 감춰진 ‘끼’를 보여줬다. 홍천=신석교기자 tjrry@donga.com


유희진양(17·서울 영파여고 3년)은 별을 좋아한다.

어려서부터 우주 비행선을 타고 별을 관찰하는 꿈을 꾸어왔다.

그러나 키가 부쩍 크면서 마음이 흔들렸다. 키 178cm에 몸무게가 45kg인 유양에게 모델을 해보라는 권유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수능시험을 100여일 앞둔 유양은 항공운항과와 모델학과를 놓고 저울질하다 동덕여대 스포츠 모델학과에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유양은 6월 ‘한국슈퍼모델선발대회’ 예선에 참가해 본선 진출 티켓을 땄다. 9월 열리는 본선을 앞두고 요즘에는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주관사가 마련한 모델 교육을 받는다. 오후 8시부터 다음날 오전 3시까지는 집 근처 학원에서 수능시험 공부를 한다.

“힘들지 않아요. 너무 재미있어요. 별 보기요? 제가 스타가 되면 되잖아요.”

유양은 동료 후보들과 1일부터 4일까지 강원 홍천군 대명 비발디파크에서 합숙 훈련을 받았다.

●모델 수업

합숙 훈련장에 들어서자 흰색 쫄티에 청바지 차림의 늘씬한 미녀들이 눈에 들어왔다. 2000여명의 지원자 가운데 서류 전형과 3차례에 걸친 예선을 통과한 39명의 슈퍼 모델 후보들이다.

최종 예선 통과자로 호명된 순간에는 진짜 모델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그러나 모델 교육이 시작되면서 하늘을 날 것 같던 우쭐함은 처참히 쪼그라들었다. 내 다리가 제일 날씬한 줄 알았는데 기다란 팔다리에 근육까지 붙은 쟁쟁한 경쟁자들을 보니 기가 질렸다. 강사들은 교육시간 내내 “너희들은 모델이 되려면 한참 멀었다”며 겁을 주었다.

본선 대회에 쓸 프로필 촬영을 맡은 제작진 앞에서 후보들은 또 한번 자존심에 상처를 입어야 했다.

“여러분들 각자 컬러가 있을 거야. 컬러 속에서도 컨셉트가 달라. 그걸 알아야 우리가 촬영할 수 있어.”

키가 큰 순서대로 번호를 매기는 관행에 따라 1번이 된 김자연씨(22·서울 서초구 잠원동)가 가장 먼저 ‘매를 맞았다’. 경희대 경제통상학과 휴학중으로 패션마케팅에 관심이 많다. 183cm에 59kg.

“뭘 보여줄 거니?”

“재즈 댄스 잘 춰요.”

“악기는?”

“풀룻 잘 불어요.”

“스포츠는?”

“스키 10년 탔고요, 스노보드, 인라인 스케이트, 수영 다 잘해요.”

“개인기가 뭐야?”

“트로트 잘 부르고 말을 잘해요. 질문하시면 바로바로 순발력 있게 받아 넘길 수 있어요.”

2번은 이번 대회 최연소 후보 중 한 명인 오지혜양(16·청주 대성여상 2년·충북 청원군 옥산면). 오양은 모델로 성공해 디자이너 앙드레 김 쇼 무대에 서는 것이 꿈이다. 180cm에 57kg, 쌍꺼풀 없이 큰 눈. 이 정도면 서울에서도 꿇릴 게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서울과 청주는 하늘과 땅 차였다. 엄마가 해준 화장에 핫팬츠를 차려 입고 예선 시험장에 들어선 오양은 미용실에서 세련되게 다듬고 출전한 서울 친구들을 보자 풀이 죽었다. 집에 내려갈 준비를 하다 합격자 통보를 받았을 때 엄마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어버렸다.

‘그래, 이제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야. 나만 바라보고 계시는 부모님과 세 명의 동생을 생각해서라도 열심히 해야 해.’

“뭐 잘하니?”

“노래하고 워킹요.”

“워킹이야 모델이면 다 하는 것 아니야? 스포츠 잘하는 것 뭐 있냐?”

“아뇨.”

“악기는?”

“피아노 조금….”

“개인기는?”

“…….”

“용기들이 너무 없다. 끼가 없어. 개인기 뭘 보여줄 거야?”

“엽기춤 출게요.”

“(엽기춤이 끝나자) 잘 하네. 그런 것 있음 바로 바로 해.”

5번 임현정씨(22·서울 마포구 창전동)는 이화여대 회화 및 판화 전공 4학년이다. 차분한 외모와 달리 무대에 서면 활달해지는 ‘무대 체질’이다. 화가와 모델은 자신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다만 표현하는 기술이 다를 뿐. 음악에 맞춰 카메라 셔터 소리를 들으며 조명이 비추는 무대를 즐기고 싶다.

“스포츠는?”

“수영을 해요. 그 중에서도 평형을 제일 잘해요.”

“악기는?”

“가야금하고 피아노 칠 줄 알아요.”

“개인기는?”

“막춤 출게요.”

“(춤이 끝나자) 진짜 막춤이구나. 막춤의 원조를 본 것 같다. 바로 그런 걸 보여 달라는 거야. 너희들 나와서 사람들 신경쓰지 마. 모델이 꺼릴 게 뭐 있어. 자기 표현하는 게 직업인데. 얼굴에 철판 까는 거야.”

●끼와 춤

패션 마케팅에 관한 특강을 듣고 있는 슈퍼모델 후보들. 상품 판매에서 모델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배우는 것도 3개월간의 수업 내용 중 중요한 부분이다

저녁에 열린 장기 자랑 시간은 더 가혹했다. 후보들은 무대 위에서 쭈뼛거리다 단체 기합을 받았다.

“무대에 서면 미친×처럼 하란 말이야.”

기합이 끝난 뒤 한 후보가 낮게 중얼거렸다.

“반말 듣는 게 제일 기분 나빠.”

“교수님도 내게 반말 안 쓰시는데….”

슈퍼모델 대회를 총지휘하는 SBS의 자회사 ‘SBS美’ 김지선 PD에게 물었다. 김 PD는 27세 여성으로 지난해부터 이 대회를 맡아 운영하고 있다.

― 왜 이렇게 몰아붙이는 거예요?

“끼를 발산하는 훈련을 하는 중입니다.”

― 끼란 무엇이죠?

“자기를 표현하는 능력이죠.”

― 끼가 그렇게 중요한가요?

“모델이야말로 끼가 필요한 직업입니다. 캣 워크로 걸어나와 무대 뒤로 들어가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은 몇 초밖에 안됩니다. 대사도 없지요. 짧은 시간에 오직 자신의 몸만으로 관객을 압도해야 해요. 포즈, 눈빛, 손동작 하나하나 끼가 철철 넘쳐 살아 있지 않으면 안돼요.”

끼 훈련이 정신 교육이라면 춤은 신체 훈련이다. 후보들은 모델 교육 기간에 하루 2시간씩 춤 연습을 한다. 1시간은 스트레칭, 나머지 1시간은 재즈 댄스다. 춤은 몸을 유연하게 하고 군살을 다듬는 데 탁월한 효과가 있다.

안무를 지도하는 이상호 무대 연출가는 후보들에게 ‘단장’으로 불렸다.

― 모델 춤이 따로 있나 봐요. 후보들에게 춤춰보라고 하면 꼭 두 팔을 위로 뻗고 몸을 야하게 꼬면서 한 바퀴 도는 동작을 하던데요.

“재즈 댄스의 일종인데 웨이브라고 하지요. 섹시하게 보이려고 후보들 사이에서 알음알음 퍼진 동작 같아요.”

― 다들 춤을 잘 추더군요.

“그렇지 않아요. 키 큰 여자들은 순발력이 떨어져서 어설퍼 보이기 쉬워요. 몸치들이 많지요. 여자는 166cm, 남자는 173cm 정도가 춤추기 적당한 키입니다. 이보다 큰 사람들은 근력운동으로 순발력을 키워줘야 합니다.”

― 모델이 되려면 춤을 반드시 배워야 하나요?

“워킹도 춤입니다. 빠른 음악이든 느린 음악이든 리듬을 타면서 걸을 줄 알아야지요. 몸의 중심을 알고 춤으로 유연성이 단련된 사람은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카리스마를 뿜어낼 수 있습니다.”

― 왜 재즈 댄스인가요.

“재즈가 신체의 선을 강조하는 동작들이 많으니까요. 이번 대회에선 영화 ‘미녀 삼총사2’에서 카메론 디아즈가 추는 클럽 댄스를 가르쳐 선보일까 해요. 하체는 고정시킨 채 어깨의 움직임이 큰 춤입니다.”

●내일이면 슈퍼 모델

3개월의 모델 교육은 원석을 상품성 있는 보석으로 다듬는 과정이다. 교육이 끝나면 후보들은 탄력 있고 유연한 몸매로 거듭난다. 모델로서 장래 희망을 묻는 사람들에게 “패션 산업에 이바지하고 싶다”거나 “균형 잡힌 몸매에 지성과 감성을 겸비하면 더 훌륭하겠죠”라고 세련되게 답할 줄도 알게 된다.

그러나 이는 “어떻게 모델이 됐느냐”는 질문에 “길거리에서 우연히 캐스팅됐다” “친구 따라 가서 원서를 내봤는데 친구는 떨어지고 나만 됐다”는 답처럼 상투적이거나 믿기 어렵다.

좀더 솔직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 후보들의 숙소를 찾았다.

― 자기보다 예쁜 여자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들어요?

“기죽지 않으려고 애써요. 내게도 남들이 부러워하는 장점이 있다고 최면을 걸지요. 자신감 없으면 모델 못 해요.”

“저는 동덕여대 스포츠 모델학과에 다녀요. 동기생 20명 모두 공주병 환자들이죠. 다들 자기가 예쁜 줄 알아요. 그런데 20명 모두가 정말 개성이 있고 예뻐 보여요.”

“저도 예쁜 사람 보면서 위축되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나만의 매력이 있는데 기죽어서 그 사람 따라 하다가는 모델 생명은 끝이거든요. 남과 다른 나만의 카리스마가 있어야 해요.”

― 어떤 모델이 되고 싶어요?

“패션 산업을 이끌어가는 모델요.”

― 패션 산업은 디자이너가 주도하는 것 아닌가요?

“우리가 입어줘야 바이어들이 움직이잖아요.”

“내가 입은 옷을 보고 사람들이 ‘나도 저 옷 사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면 모델로서 성공한 거죠.”

― 누가 1등이 될 것 같아요?

“(일동) 저요, 저!”

홍천=이진영기자 eco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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